<최진영 작가의 결 따라 책 읽기 1>(25-12)
<최진영 작가의 결 따라 책 읽기 1>(25-12)
작가 최진영은
'7월입니다.
허연 시인의 <칠월>을 마음껏
읽을 수 있는 계절이에요.
(p146, 어떤 비밀)'라고 했다.
마침 3월의 마지막 날이다.
나는 다가오는 4월에 마음껏
읽을 시가 있는가?
... 없다.
부끄러운 마음이 일었다.
감사하게도 오히려 그것이
허연 시인에게로 이끌었다.
그는 지금까지 다섯 권의 시집을
이 세상에 내놓았고,
<칠월>은 그의 첫 시집
<불온한 검은 피>(1995)에
담겨 있다.
이 책으로 그를 만나려다가
그의 등단 30주년을 기념해서 나온
시선집 <천국은 있다>(2021)에
먼저 손이 갔다.
이 책의 발문을 쓴 유희경 시인은
허연의 첫 시집을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곁에 두고 '거푸 읽었다'라고,
그의 다음 시집을 13년 동안
기다리고 기다렸다고 한다.
30년의 시간을 따라
깊어지는 애심으로 지금껏
온 것이다.
최진영이 아니었으면
평생 만나지 못했을 그를
이제서야 역주행으로
허연의 30년을
파노라마처럼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진 것에 감사하다.
'삼십 년 동안 그가 지어 올린 시의 세계는 소문도 없이 은밀하게 우리가 원하는 공화국이 되었다. 우리는 허연의 시를 통해 상실한 줄도 모르고 잊어버린, 그리운 줄도 모르고 그리워하는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곳은 근원적 슬픔이 주권자인 세계, 슬픔이 삶의 모든 권력을 집행하고 현재를 휩쓸어가는 세계, 그리하여 온몸의 촉수가 그리움을 앓게 하는 슬픔의 공화국이다... 그는 번잡한 도시의 일상에서 고독을 지켰고 인간을 증오하되 가련히 여겼고 과거를 그리워하되 지금을 용서했고 미래를 기대하지 않되 소멸의 운명을 끌어안았다. 허연은 이 비장하고 쓸쓸하고 의연하고 무심한 태도를 끝까지 고수해왔다.'(p128,148 오연경 해설 중에서)
◆ 책 읽다가 그 몇을 쓰다
2021년 신작 12편의 시로부터 시작해서 역주행하면서 1995년 <불온한 검은 피>까지 총 72편의 시가 이어진다. 색인 스티커 수십 개가 책을 뚫고 나와 있다. 이제 이것들 중심으로 다시 읽어 보면서 그 몇을 적어 보려 한다.
코로나 이전에 호주로 가족여행을 떠난 것이 마지막일 거라라고 생각했다. 감사하게도 또다시 가족 여행을 다녀왔다. 어느덧 성인이 된 아이들이 이번에 어렵게 시간을 내주었다. 이번에는 홍콩이다. 거기에 가기 전 주에 허연을 만났다. 여행 시작 전에 끝내려 했지만 그러지 못해서 부득이 가는 비행기에 그와 동석을 했다. 곧 홍콩 공항에 도착한다는 기장의 알림이 있을 무렵 나는 그의 20대 시절과 함께 하고 있었다. '나는 지금 출근한다. 이해하지 못한 채 끌려간다.'(p124,<출근, 1995> 중에서) 나도 그때 이런 마음으로 출근하고 있었다. 왕복 3시간이 걸리는 거리를. 그와 나는 나이가 같다. 나의 30년과 겹치는 시구가 나오면 더 진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앞으로 홍콩 하면 가족 다음으로 허연 시인이 떠오를 것 같다.
<시월의 시>(p28, 2021)
- 10월이 되면 앞으로 나는 이 시를 마음껏 읽고 싶다. 특히 이 부분을. '... 시월엔 가득 찼던 것들과 뜨거워졌던 것들이 저만치 떠날 짐을 꾸린다. 그걸 알아챈 추억들도 남쪽으로 가고. 시월엔 이별이 전부다. 시월은 이별밖에 할 줄 모른다. 시월에 무릎을 꿇는 이유다. 세상엔 만남의 몫이 있는 만큼 헤어짐의 몫도 있어서 이토록 서늘하다.' 나의 곁을 떠나고 있는 이들이 하나씩 늘어나고 있다. 나의 결국도 이 세상과의 이별이지 않는가. 인생의 시월을 맞고 있는 내가 되새겨 볼 부분이다. 나를 겸손하게 하고 오늘을 감사히 살아가게 하기 때문이다.
<천국은 있다>(p35, 2021)
'쓸 수 있는 단어들이 줄어드는 걸 보면 천국은 분명히 있다...'
- 아멘. 고된 생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천국은 있어야 한다. 불공평한 세상에서 그늘진 자리에 있는 이들을 위해서도. 이대로 끝난다면 너무 억울하고 불쌍하다. 나는 신앙인이면서도 천국을 지루한 곳이라 가끔 생각한 적이 있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얼마 전에 깨달았다. 스캇 솔즈 목사는 천국을 '시간이 지날수록 계속해서 전보다 더 좋아지고 온전해지고 만족스러워질 것이다'라고 했다. 이 세상 사고에 젖을 대로 젖은 나로서는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곳, 바로 그곳이 진짜 고향인 것이다. 이 믿음이 이 세상의 나그네 삶을 견디게 하고 지금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준다. 오늘은 어제보다 천국이 하루 더 가까워진 기쁜 날이다. 이것이면 족하다. 감사뿐이다. 뭘 더 바라는가?
<북회귀선에서 온 소포>(p64, 2016)
'때늦게 내리는 / 물기 많은 눈을 바라보면서 / 눈송이들의 거사를 바라보면서 / 내가 앉아있는 이 의자도 / 언젠가는 / 눈 쌓인 겨울나무였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 시인의 남다른 시선에 놀란다. 지금은 나무의자가 그렇게 많지 않다. 안산 자락길을 걷다 보면 도처에 두 사람 남짓 앉을 수 있는 작은 나무의자가 놓여 있다. 나는 눈 오는 날 그들을 그냥 의자로만 보았지, 한때 눈을 맘껏 맞았던 나무로 본 적이 없다. 이런 시선이 부럽다.
홍콩으로 가족 여행을 다녀오는 바람에 거의 10일 만에 안산을 올랐다. 그동안 산은 봄의 폭죽을 터뜨리고 있었다. 이름 모를 나목에 밝은 녹색 잎들이, 바위틈을 뚫고 나온 진달래의 연분홍 꽃잎들, 자락길가를 노란 꽃잎으로 물들인 개나리들이 각각의 봄을 연주하고 있었다. 겨우내 쥐 죽은 듯이 있었던 그들이 봄기운에 일제히 나팔을 불고 있는 듯했다. 이런 장면을 보고 시인들은 무엇이라 읊을까? 허연은 <봄산>(p73-4, 2016)에서 '볼품없이 마른 활엽수들 사이로 희끗희끗 / 드러나는 사연들이 있어 봄산은 / 슬프게도 지겹게도 인간적이다... 산은 무심해서 모든 것들의 / 일부고, 그런 봄날 / 생은 잠시 몸을 뒤척인다. / 다 귀찮다는 듯이.' 역시나 일반적인 시선이 아니어서 또 놀란다.
<난분분하다>(p100, 2008)
'안 가 본 나라엘 가 보면 행복하다지만, 많이 보는 만큼 인생은 난분분亂紛紛할 뿐이다.'
- 홍콩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이 시를 읽는데 갑자기 못 볼 것을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여행이 이제 시작인데 이런 시구를 대면하다니 조금 찜찜했다. 거의 5년 만에 가는, 그것도 몇 번을 미루다가 이번에 가게 된 것인데, 허연 시인은 괘념치 않고 이렇게 냉정하게 나에게 툭 내뱉었다. 이런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을 리 없다. 그래서 바로 다음 시로 눈길을 돌렸던 조금은 비겁한 내 모습이 기억난다. 이제 읽어보니 이 시도 살아가면서 되새김질할만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 '내 앞에 있는 것만 보는 것도 단내가 나는 일인데.' 단내 나는 현실을 보는 것도 감당이 안 된다는 시인의 토로가 나를 포함한 보편적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번 가족여행은 패키지로 가지 않아서 보는 욕심만 채우지는 않았다. 어느새 성인들이 된 아이들과 이렇게 집중적으로 함께 했던 적이 얼마 만인지 모른다. 홍콩 곳곳의 기억 속에 가족들이 담긴 시간이어서 조금은 난분분한 면도 있었지만 좋은 점이 더 많았다고 할 수 있다. 여행 갈 때마다 이 시를 나는 기억할 것 같다.
이 책 마지막 부분에 있는 <나쁜 소년이 있다>(2008), <불온한 검은 피>(1995)의 시들에는 거의 대부분에 색인 스티커가 붙어 있다. 이 시집들은 따로 각각을 제대로 읽어 보려 한다. 후자를 먼저 하고 13년 만에 나온 전자를 뒤로해서. 유희경 시인이 왜? 허연의 첫 시집을 너덜너덜하게 읽을 수밖에 없었고, 그다음 시집을 13년 동안 애타게 기다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게 된 것만으로 족하다. 더불어 유희경 시인의 시집도 이 시집들을 다 읽은 후에 만나고 싶다. 이렇게 설렘의 책 읽기 계획이 또 하나 만들어지는 기쁜 시간이다.
- 헤리의 반려책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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