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회 2>(25-15)
책에 색인 스티커를
붙여가면서 읽는 재미에
요즘 빠져 있다.
한 권을 다 읽고 나면
수십 개의 각기 다른 색을 띤 것들이
책 사이를 뚫고 나와 있다.
그때 그 순간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흔적들이다.
마음을 가다듬고
그 부분들을 다시 펼쳐본다.
"여기에 왜 이것을 붙였지?"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나지 않거나,
"아~맞아 이 부분!"
다시 상기되면서 감흥이 되살아나는
것들도 있다.
후자의 것들 중 그 몇을 두고
나와의 대화를 다시 한다.
잠시 반려로 맞았던 책과
헤어질 결심을 위해서.
신간 <밤 인사>(2025)도
그렇게 읽은 책 중의 하나다.
함정임 작가!
작년 겨울이 시작될 무렵,
<모든 것이 거기 있었다>(2024)에서 만났을 때
그녀의 소설을 읽어 보지 못하고
또 산문으로 만났던 아쉬움이 기록한 적이 있다.
'아직 함정임의 소설을 읽어 보지 못했다. 세계문학예술기행서인 <태양의 이쪽, 밤의 이쪽>으로 처음 만난 그녀. 그 후 그녀의 소설을 읽어야지, 했는데. 또 그녀 기행서를 읽고 있다'(네이버 마이 블로그 <#함정임 작가, 24.12.5> 중에서)
솔직히 이렇게 빨리
그녀와 소설로 재회할 줄은 몰랐다.
그것도 신간 <밤 인사>(2025)로.
밤 인사,
'아들들~ 잘 자~
어머니~ 잘 주무세요~'
쉽고 가볍게 잠자리로 들면서
던지는 말들이다.
인사를 건넬 수 있는 대상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다시금 깨달았다.
또한 이것이 한 소설의 모티브가 될 수 있다는 것도
이번에 알게 된 소득 중의 하나다.
밤 인사를 챗 GPT에 물었다.
'하루의 끝에서 전하는
따뜻한 위로와 연대의 마음'
이라고 한다.
함정임 작가는
이 짧은 인사 '잘 자요'로
한국에 있는 미나와
프랑스에 있는 장(진)을
연결시킨다. 또 한 사람 윤중까지.
각자의 썸 타는 마음의 티키타카를
문학과 함께 풀어 가는 섬세한 터치의 이야기다.
'장은 잘 자요.라고 말하던 미나의 음성과 표정을 떠올렸다.'(P40)에서
'잘 자요, 진'(P170)이 나올 때까지.
여기에 나오는 낯선 지명이나 작가, 책 제목이
나에게는 전혀 방해가 되지 않는다.
이미 함정임의 문학 기행서 두 권으로
수용할 수 있는 훈련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낯선 작가나 책이 나오는 부분은
보물단지처럼 반가웠다.
'공간은 오랜 기간 경험하고 탐사한 장소, 지명들이다. 허구의 인물, 이야기라고 하지만 그 안의 사정과 마음의 흐름은 진실을 따르고 있다. 소설의 본령이 그러하듯이. 일상에서처럼. 이 소설에는 나의 이전 소설을 비롯해 국내외 작가의 소설과 그림 텍스트들, 뉴스 매체 자료들이 무늬로 짜여 있다.'(p176, 작가의 말 중에서)
그녀를 세 번 만나면서 그 결을 따라
읽을 책들이 계속 쌓여 가고 있다.
정혜윤 PD 다음으로 해서 그 몇을 읽어 보려 한다.
이 소설의 더 비기닝인 <어떤 여름>도 포함해서.
◆ 책 읽다가 그 몇을 쓰다
봄비가 내리는 지금 나는 조금 전에 한 권의 책을 보내고, 새로운 이와의 만남을 이어 가고 있다. 3분의 1쯤 색인 스티커가 이미 붙여져 있는 책 <밤 인사>(2025)를 다시 펼친다. 작년 1월 찐 불문학도 함정임 작가를 다시 만났다. <모든 것이 거기 있었다>(2024)는 그녀가 불문학과 예술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전 생애를 바쳐서 그것들과 연애한 30년의 기록이다. 한 번에 다 소화할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할 수밖에 없다.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 전역까지, 작가를 넘어 예술가까지. 낯선 프랑스 거리, 건물 그리고 작가의 이름들이 나온다.
지금 읽고 있는 <밤 인사>에도 그 정도 아니지만 어쩌면 그중 진액들이 담겨 있는 줄도 모른다. 직접 발품을 팔아가면서 프랑스 곳곳을 몸으로 익힌 그 현장들과 그녀가 애장하는 작가의 책들이 소설 도처에 놓여 있다. 소설의 스토리를 따라가면서 동시에 나는 지금 보물 찾기를 하고 있다. 그녀의 결을 따라 읽을 책들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천천히 색인 스티커를 떼어가면서 이 소설을 다시 읽어가고 있다. 헤어질 결심을 하고 떠나보내기 전에 그 몇이라도 담아보려고 한다. 도처에 있는 함정임의 반려책들도 가능한 놓치지 않고 기록으로 함께 남기고 있다. 미나와 윤중, 장(진) 이 셋의 이야기를 따라가는데 이전의 일독으로 알지 못했던 것들도 조금씩 이해가 되는 부분들도 발견하게 된다. 마음 같아서는 하나하나 다 응하고 싶지만 욕심을 버리고 몇 개라도 깊게 새겨 보려 한다.
. 소설을 쓰게 된 것은 순전히 강지섭이 남긴 빨간 수첩에서 비롯된 우연의 소산이었다.(p26)
- 강지섭? 작가, 미나의 전 애인. 이 정도의 정보만 이 책에 서 알 수 있다. <어떤 여름>에 더 자세한 것들이 담겨 있으리라. 함정임은 이것을 더 비기닝으로 삼아 지금의 장편 소설 <밤 인사>로 확대 전개했다. 그것도 10년의 세월 동안. 그 사이 코로나 팬데믹도 겪었다. 소설의 끝자락에 블랙스완 같은 이것이 예기치 못한 충격을 주는 데 쓰인다. 아마 이 소설이 그전에 나왔다면 함정임은 이 전개를 어떻게 마무리했을까?
. '발터 벤야민... 독일인 문예비평가.'(p16)
- 미나는 <어느 여름>으로 소설가가 된다. 그 후속편 <어느 겨울>을 써 보면 어떻겠냐는 장의 제안으로 다시 프랑스로 향한다. 미나는 발터 벤야민의 책 서평을 쓴 적도 있고, 윤중이 파리 가는 비행기에서 읽으라고 준 책이 우연히도 그의 책 <모스크바 일기>였다. 그것이 단초가 되어 미나는 이번 여행을 파리에서 스페인 동쪽 국경 끝에 있는 포구인 포르부까지 가기로 한다. 나에게는 낯선 작가인 발터 벤야민의 유해 없는 묘지가 있는 그곳으로.
그 가는 여정 내내 장이 가이드처럼 함께하고, 간간이 윤중의 연락도 이어지면서 그들의 썸이 함정임의 섬세한 필력으로 그려진다. 미나는 현실의 장, 윤중보다 이 세상에 없는 발트 벤야민을 잃어버린 애인 찾듯 몰두하는 것 같다. '그만큼 벤야민이란 늪에 나도 모르게 빠져 버린 것으로밖에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뜬금없이 빨려 든 사랑처럼.'(p131)
이런 미나에게서 함정임 작가가 겹쳐 보인다.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작가와 예술가들의 묘지를, 그것도 30년이 넘게 아직도 찾고 또 찾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에 빠진 여인처럼. '누군가의 죽음이 새겨진 묘석들을 따라 걷는 일은 낯선 경험이었다. 어떤 죽음은 100년도 더 전에 일어났고, 어 떤 죽음은 일주일 전, 또는 사흘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p122)
. 어제와는 분명히 다른 오늘이었지만, 이 순간을 쓰지 않으면 어제와 똑같은 어느 날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p78)
- 그렇구나. 그렇다. 기록하지 않으면 켜켜이 쌓여온 나날들은 한 뭉텅이가 되어 버린다. 각각의 차별을 지나고 나서는 되찾기가 어려워진다. 어렴풋한 기억만으로는 그것들을 나누려야 나눌 수가 없기 때문이다. 기록을 하는 이유 하나를 더하게 된다.
나는 책만 읽었다. 30대 초반 책 읽고 나름 서평이라고 적은 것들을 모아서 책을 낸 적이 있지만 그 후로는 절필했다. 순수한 글쓰기가 점점 사라지고 글을 자꾸 만들고 있었다. 내 것이 아닌 것들로 화려하게 보이려는 욕심들이 생기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몇 년도 채 되지 않았다. 마치 나의 퇴직을 예감한 듯 그 몇 달 전부터 몇 자라도 적어 보고 싶어졌다. 우선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책 읽고 그 소감을 몇 자라도 적어 보자며 시작했다. 지금은 그것에 더하여 아침저녁으로 내 삶의 일상까지 적어 보고 있다. 노트에 만년필 잉크를 갈아가면서. 짜릿한 손맛도 느끼면서.
여전히 TV나 스마트폰이라는 무용한 바다에 시간들을 허투루 버리는 일들이 하루 중에 상당하다. 조금씩 그것들을 줄여가고 글 쓰는 시간들을 늘여 가고 싶다. 그러다 보면 이 순간을 더 충실히 채우면서 어제 보다 좀 더 나은 나를 만들어 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기대가 오늘처럼 다시 책상에 앉아 글을 쓰게 하는 힘이 되고 있다. 감사하다. 이 기록하는 삶의 여정을 위해, 파이팅!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면 그 후속편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이어지는 것을 종종 본다. 드라마도 보통 12에서 16부작으로 해서 끝나는 경우가 많다. 시청률이 좋아지면 더 늘리거나 시즌 2를 예고하는 장면을 마지막에 보여 주면서 그다음을 기대하게 한다. 이 장편 소설 <밤 인사>는 이미 그 더 비기닝인 단편인 <어떤 여름>의 후속편이다. 1장을 빼먹고 2장부터 보는 듯한 느낌은 조금 있지만 전체 소설의 흐름을 따라가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다. 그래도 나는 기회를 만들어 <어떤 여름>이 담긴 소설집을 읽어 볼 예정이다. 이보다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면서 나는 이 소설의 다음 편을 기대하는 마음이 커졌다. 작가로서 살아가는 미나의 이후 삶이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내가 먼저 이 소설을 응원하는 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부디 그렇게 되어 함정임 작가가 이다음을 말해 주면 좋겠다.
- 헤리의 반려책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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