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헤윤 PD의 결 따라 책 읽기 1>(25-16)
노벨문학상?,
한국의 작가가 받는다는 것은
너무나 먼 일이라 생각했다.
한강 작가가
오랫동안 해묵은 패배의식을
말끔히 제거해 주기 전까지.
한강 작가의 책은
그때까지 딱 한 권
읽은 적이 있다.
그녀가 상을 받고
내 서재를 돌아 보니
아직 읽지 않은 책이
하나 더 있었고,
얼마 전에 아파트 책 나눔터에서
또 다른 하나를 반려로 맞아
총 3권이 나란히 놓여 있다.
어느 시기가 되면
연이어 한강 작가와 다시 만나려 한다.
이번에 다른 노벨 문학 수상자를
먼저 만나게 되었다.
정혜윤 PD가
올가 토카르추크의 책
<다정한 서술자>(2022)를 읽고
찾아 헤매던 문장을 거기서 발견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이 책으로 그녀와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최근에 접하지 못한
새로운 시선이 담긴
몇 편의 에세이를 읽다가
갑자기 나의 책 읽기가 멈추어졌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도
책을 읽던 나의 루틴이
너무나 쉽게 무너졌다.
우연히 보게 된
중국 판타지 드라마
<소년가행>(2022)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 서사가 상당한 스케일이고,
그다음 편을 궁금하게 만드는 플롯과
CG로 처리된 영상미의 수준이 뛰어나서
잠자리에 들어서까지 보게 된 것이다.
오서붕(아오루이펑)이라는
미남 배우에게 팬덤까지 생길 정도로.
바람이 나도 제대로 난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 오서붕의
다른 작품들을 들락거리고 있다.
사실 그의 최신작 <백월범성>(2025)을
보고 있는 중이다.
이전보다는 조금씩 자중하면서.
책을 읽고 글 쓰는 일이
이렇게 쉽게 허물어지다니.
이런 외도(?) 속에서
올가 토카르추크와의 만남은
간헐적이 되었고
많이 소원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언제든지 내가 다가서면
불평하나 없이 하고 있던
이야기를 이어서 해 준다.
그런 과정 속에서도
그녀가 들려준 이야기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400페이지가 채 안 되는 이 책에 붙인
색인의 수가 거의 300개에 가깝다.
놓치고 싶지 않거나 기억하고 싶은
글들이 여느 책보다 많았다는 증거다.
이것들에 일일이 다 반응하려는
내 욕심을 내려놓고 그중에 몇에만
집중해서 기록해 본다.
◆ 책 읽다가 그 몇을 쓰다
. 오그노즈야(종합적인 방식으로 문제에 접근하는 능력, 저자가 만든 신조어)가 손상될 경우 세계를 통합된 전체로 인식할 수 없다... 이때 오그노즈야의 회복을 위한 치료법으로 종종 소설을 이용한 테라피가 적용된다.(P40)
- 2000개의 퍼즐 조각들이 흩어져 있다. 그 조각 하나하나 개별로만 보이고, 그것들을 하나씩 맞추려고 하고 있지 않다. 아니 사실은 맞출 줄 모른다. 답답한 지경인데도 그것을 인지조차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여기에 자유롭지 못한 나를 보게 된다.
유튜브의 알고리즘, 점점 믿기 힘들어지는 각양의 여론 몰이들, 가짜 뉴스들...에 영향을 받아서 무엇이 맞고 틀린 지를 판단하는 것이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 '카더라'를 자기 생각인 양 여기며 쉽게 편승해 버리려 한다. 그렇게 점점 통찰력을 상실해 가고 있는 것이다.
소설이 치매 예방에 좋다고 하는 글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이정일 작가는 성경을 깊게 이해하려면 문해력을 길러 주는 소설이 도움이 된다고도 했다. 여기에 더해 올가 토카르추크는 소설의 또 다른 효력, 통찰력 회복제가 소설이라고 말하고 있다. 소설의 유익을 한층 더 알았으니 나의 소설 사랑은 더 깊어질 것 같다.
. 당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그것이 무엇이든 내게도 일어나고 있다. 그러므로 '타인의 고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환영에 불과한 가상의 경계선은 나와 다른 사람들, 나아가 인간과 동물을 갈라 놓을 뿐이다.(p76)
-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력이 점점 떨어지고 있는 것 같다. 반면에 각자도생, 나만 아니면 돼!,라는 극단의 이기주의는 강해지고 있다. 고슴도치가 되어 서로를 찌르며 살아가는 것에 어느덧 익숙해지고 있는 듯하다. 참사의 소식들을 들어도 그 순간 잠시 애도할 뿐 그 고통은 온전히 당한 자들의 것으로 남겨지고, 그렇게 서서히 잊혀 간다. 내가 당하지 않는 이상은 그것은 여전히 경계선 밖의 남의 일로 여겨진다. 이 시간에도 세게 도처에는 전쟁으로, 기근으로, 전염병으로, 갑작스러운 사고로 죽어가는 이들이 허다하다. 이런 것에 점점 무심해지는 나는 공감력이라는 것이 있긴 한 건가?, 이런 반성이 일시적이 되지 않기 위해 오늘도 글 쓰며 나를 돌아 본다. '그러므로 모든 일에 너희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여라.'(마 7:12_우리말 성경)
여기에 실린 12편의 에세이들 하나하나가 다 알 차고 신선하다. 그중에서도 유일하게 색인 스티커를 가로로 붙여 다른 것들과 별개로 한 것이 있다. 바로 <소금에 담근 손가락, 즉 내 간단한 독서 이력에 관하여>라는 에세이다. 암기력이 뛰어난 연기자는 대본을 사진처럼 기억하고, 바로 그것을 대사로 표현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런 능력이 내게 있다면 그렇게 내 머릿속에 다 저장하고 싶을 정도로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문장들이 가득하다. 그 몇을 여기에 담아 본다.
'모든 종 중에서 오직 인간만이 이처럼 불가사의한 '읽기' 능력을 획득했고, 덕분에 자신이 처한 현실로부터 일정 시간 동안 정신적으로 도피할 수 있는 특권을 갖게 되었다.'(p108)
'지금까지 심리학자들은 유익한 독서 활동이야말로 건강한 정신의 특징 중 하나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독서는 건강하고 균형 잡힌 정신의 특권이라고 할 수 있다.'(p109)
'소설을 읽는 사람들은 어떤 면에서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더욱 커다란 존재'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잠시나마 타자의 삶을 살아 보았기에 보다 폭넓은 인식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p112)
'오로지 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만 책을 읽는 건 책에 대한 모독이나 마찬가지라고 나는 생각한다. 책을 읽는 건 경험하기 위해서이며, 경험이야말로 보다 심오하고 포괄적인 이해의 유형이 아닐까.'(p120)
'우리가 지금 여기에 있는 건 책을 읽기 위해서다.'(p133)
. 우리로 하여금 미처 가늠조차 못 하는 전체의 극히 작은 부분만을 사용하도록 우리를 자꾸만 축소시키려 합니다...
작가의 정신이란 결국 모든 파편과 조각들을 집요하게 끌어모아서 그것들을 이어 붙여 보편적인 전체를 창조하는 일종의 '종합적인 사고'를 의미한다고 나는 믿습니다...
문학이란 우리와 다른 모든 개별적 존재에 대한 다정함에 근거합니다. 이것이 바로 소설의 기본적인 심리학적 메커니즘입니다...
그렇기에 나는 믿습니다. 이야기를 서술하면서 나는 이 세상이 우리 눈앞에서 끊임없이 형성되고 있는 살아 움직이는 거대한 단일체이며, 동시에 우리 인간은 그 세상의 작지만 강력한 일부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p354-356)
- 책 중반부 이후에 있는 <서술자의 심리학>에서 <메탁시의 영토>까지 총 4편은 '국립 우츠 대학교 철학부에서 특강을 맡으면서 작성한 일련의 강연록들'이 담겨 있다. 작가 중에 특히 소설가가 되려는 이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다. 그녀의 진액 같은 노하우가 듬뿍 담겨있기 때문이다.
그다음으로 이어지는 마지막 편이 그녀의 '노벨 문학상 수상 기념 강연록'이다. 가장 많은 색인 스티커가 붙어 있다. 어느 것 하나 놓치고 싶지 않다는 내 마음의 표현일 것이다. 이 글을 적는 동안에도 나는 최근에 나온 그녀의 소설집을 반쯤 읽고 있다. 점점 축소화되고 파편화되는 세상에 '다정함'의 시선으로 그것들을 연결하여 '종합적 사고'를 부여해 주는 것이 작가라고 하는 그녀의 소설을 빨리 보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연속적으로 한 작가를 이렇게 만나는 것은 처음이다. 한동안 올가의 책을 몰아보려 한다. 그다음은 한강이다.
한동안 이 책을 잊을 수 없을 듯하다. 책 읽기가 거의 멈추는 듯했고, 글쓰기는 하기 싫은 숙제를 하는 듯했던 힘든 시기에 함께 했기 때문이다. 23년 12월 무라카미 하루키의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2023)를 한 달 이상 이처럼 힘들어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 후로 다시 회복하였고 새로운 작가들을 만나고 나를 성찰한 것을 글로 적어나가는 일이 활력을 주었다. 이번에도 갑자기 찾아온 모든 것이 무용하게 느껴지는 슬럼프, 이 또한 지나갈 것이다. 파이팅! 헤리우스!
- 헤리의 반려책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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