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작가 몰아서 만나기 2>(25-21)
장마가 있는 듯 없는 듯
게눈 감추듯 사라지고,
때이른 폭염과 열대야가
전국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매년 여름을 나고서도
이번 여름은 더 낯설게 여겨진다.
투발루?
인친 우아한 왕비님의
피드에서 처음 알게 된 나라다
지구온난화로 매년 해수면이
상승하고 있단다.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나라 중 하나라고도.
이렇게 인류세의 혹독한 대가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도처에 그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
지구가 아프다!
그것도 많이.
인생도 마찬가지다.
한강 작가는
<채식주의자>(2007)에서
폭력에 잠식되어 결국에는
인간이라는 종이 되기를
거부하는 처절한 몸부림을 보여 주었다.
3년 후 그녀는
<바람이 분다, 가라>(2010)로
그때 했던 질문의 다음을 이어간다.
'그다음의 소설 <바람이 분다, 가라>는 이 질문들에서 더 나아간다. 폭력을 거부하기 위해 삶과 세계를 거부할 수는 없다. 우리는 결국 식물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 마지막 장면에서 죽음과 폭력으로부터 온 힘을 다해 배로 기어 나오는 그녀의 모습을 쓰며 나는 질문하고 있었다. 마침내 우리는 살아남아야 하지 않는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진실을 증거해야 하는 것 아닌가?'(<빛과 실> 중에서)
올가 토카르추크는
'아마도 모든 문학적 인물이
거주하는 적절한 주소지일 것'이라고 한
'메탁시의 영토'를 말한 적이 있다.
한강 작가는 이번에 그 영토에서
'정희'를 소환해서 이 질문을
소화해 내고 있다.
'먼저 죽었어야 할 사람은 나였다.'(26)라며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던 정희다.
친구 인주가 자살한 사유의 문들을
열어가다가 마침내 자신도
죽음의 문턱에서 선다.
'포기하고 싶다고 생각할 때마다 가슴과 배가 벌레처럼 필사적으로 꿈틀거렸다. 한 뼘. 또 한 뼘. 폭발하는 소리를 내며 책상이 부서져 내렸다.
살고 싶다.
살고 싶다.'(p381)
라고 외치며 죽을힘을 다해
'무릎이 짓이겨진 채 뜨거운 배로 바닥을 밀고 간다.'(p387)
살아서 진실을 말해 줄 이가 있기 때문이다.
죽음이 죽음을 부르는 그 악순환을
그대로 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강 작가와 몰아서 만나고 있다.
연이어 그녀는 말한다.
'오랜 세월 운석들과 충돌해 수두를 앓은 흉터 같아진 뒷면'(P218)을 가지고 있는 달처럼 우리네 삶도 그러하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견뎌야 한다고,
살아내야 할 이유가 있다고,
반드시!
곁에서 나태주 선생도
안타까운 시선으로
한몫 거든다.
'그냥 이렇게 사는 거예요.
사는 게 참 초라한 겁니다.
그런데, 그래서 나쁜가요?
그래서 불행한가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불행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문제는 마음입니다.
불행과 고난이 전혀 없는 삶이 아니라,
그럼에도 행복할 수 있는 것이
진정 행복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나태주의 풀꽃 인생수업>(2025) 중에서)
◆ 책 읽다가 그 몇을 쓰다
. 죽음 따위 무섭지 않아. 강도나 치한 같은 것, 겁 안 나. 그렇게 걷다 보면 갑자기 깨닫게 돼. 정말 두려운 사실을...... 어디도 더 갈 데가 없다는 걸.(p186)
- 누군가의 아픔을 그것도 직접 체험해 보지 않고도 한강 작가는 마치 그 내면을 들여다본 것처럼, 아니 자신이 오롯이 그것을 체화해 본 사람처럼 글로서 묘사하고 있다. 그것들을 들여다보며 나는 더 이상 가지 못하고 있다. 낯설기 때문이다. 솔직히 이렇게까지 애통한 적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뭐라도 반응해 보려고 억지로 짜내듯이 이것저것 글을 만들고 있다. 이어지지 않는 문장들만 나열되고 있다. 공사장에 버려진 잔재처럼. 그냥 들어달라는 것인데 설명충이 되어 마치 자기가 신이라도 된 듯이 촌철살인을 구사하고 싶어 하는 오만에 빠져 있는 나를 본다.
마음으로만 반응하기로 한다. 그랬구나! 그렇게 아팠구나! 마음으로 읽으면 되는 것이다. 인위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없다. 삶에서도 마찬가지다. 아픈 이 앞에서는 그냥 묵묵히 들어주고, 당신 곁이 되어 주겠다는 마음으로 대하면 된다. 선생이나 상담사가 되려 하지 말고.
'그 여자는 그렇게 계속 썩어갔어요. 고인 물처럼. 충치처럼. 감염된 환부처럼. 그러다 죽었지요. 그것 말고는 출구가 보이지 않았던 거예요. 그것 말고는 길이 없었던 거예요. 그 여자에게는.'(p239, 그 여자=서인주 어머니)
. 내가 아픈 곳은 달의 뒷면 같은 데예요. 피 흘리는 곳도, 아무는 곳도, 짓무르고 덧나는 곳, 썩어가는 곳도 거기예요. 당신에게도, 누구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보이지 않아요.(P219)
- 대기권의 높이가 서울에서 부산 가는 거리에 불과한 <450킬로미터>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더군다나 '450킬로미터의 납작한 두께 안에 삶이 펼쳐지고 있다'라는 관점으로 세상을 본 적도 없다. 아하! 이 납작한 공간 속에서 태어나 일생을 살고 죽는구나. 그 너머를 인공위성과 우주선이 뚫고 나가더라도 이런 사고는 앞으로 살아가는 인생에 도움이 될 것 같다.
이렇게 처음을 연 한강의 이야기는 <달의 뒷면>에 이른다. 인생에도 이런 달의 뒷면과 같은 내면이 있다고 말한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라는 어릴 적 들은 속담과 연결이 되면서 나와 타인을 돌아보게 된다.
먼저 나를 들여다본다. 왜 이렇게 화가 많아졌는지를.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그런 적이 몇 있긴 했지만 그것이 나의 약점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그것을 제대로 알게 된 것은 퇴직 이후다. 새로운 시공간에 떨어져 멀미 증상에 시달리면서 내면의 가장 약한 부분이 터진 것이다. 별것 아닌 일에도 짜증을 내고, 언성까지 높이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집에서뿐만 아니라 나가서까지도. 마치 아바타가 된 듯이 누군가가 나를 조정한다고 느낄 정도로 낯설었다. 얼마나 스스로 놀라고 당황했는지 모른다. 나름대로 조심한다고 해도 지금도 여전히 경계해야 할 부분이다.
나를 놀라게 한 타인들을 떠올려 본다. 동료로 지내며 친구처럼 지낸 이가 먼저 승진을 하자 '나는 너는 급이 다르다'듯이 우쭐대는 모습, 멀쩡했던 친구가 갑자기 공황 장애에 시달려 힘들어하는 모습, 유능했던 친구인데 상사로부터 전화가 오면 심장이 뛰고 패닉이 온다는 모습 들을... 그리고 그들에게 무심했던 나를.
'달의 뒷면'을 누구나 가지고 있다는 것! 잊지 말자. 이해할 수 없는 나와 타인을 대할 때 말이다. 이렇게라도 내 마음에 새겨지는 시간을 준 한강 작가에게 감사하다. 언제나 손을 뻗으면 반가운 얼굴로 나를 맞이해 주는 한간 같은 작가들이 있어서 고맙다. 그 만남에서 다가온 몇을 두고, 나를 돌아보면서 기록으로 소화해 가는 것이 소중하다.
. 네 번의 겨울을 이 소설과 함께 보냈다... 이 소설 때문에, 여름에도 몸 여기저기 살얼음이 박힌 느낌이었다. 때로 이 소설을 내려놓고 서성였던 시간, 뒤척였던 시간, 어떻게든 부숴야 할 것을 부수며 나아가려던 시간들을 이제는 돌아보지 말아야겠다.(p389, <작가의 말> 중에서)
- 소설을 다 읽고 다시 맨 앞에 있는 차례 항목을 하나씩 들여다본다. 그 마지막이자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바람이 분다, 가라>에 다다르기까지 한강 작가의 고뇌가 고스란히 담긴 것들이다. 네 번의 겨울을 보내는 동안.
<채식주의자>의 영혜나 이 소설 속의 서인주와 그 어머니는 인생의 바람 앞에서 일상이 멈추었고, 급기야 이 세상의 아웃사이더가 되어 가면서 급기야 스스로 이 세상이 아닌 다른 탈출구를 찾게 된다. 이렇게 또 끝난다고? 너무 힘들다. 이 이야기들을 독자로서 소화하기가...
다행이다. 한강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견뎌내며 더 간다. 그럴 수 없다는 내면의 질문이 강하게 일어났을 것이다. 살기 위해 온 힘을 쏟아서 배로 바닥을 기어 나오고 있는 정희를 통해 질문을 완성하고 있다. 작가 스스로와 이 책을 읽는 이들에게, 아프게 살아가는 인생들에게 던질 질문을. '마침내 우리는 살아남아야 하지 않는가?'라고.
강한 바람이 불면 피하자도, 멈추자도 아니다. 가라,라는 말로 못을 박는 이유다. 그래, 가는 거다. 언제 바람이 불지 않은 때가 있었는가? 나는 그런 바람이 불 때 가기보다는 움찔하면서 멈추거나, 피하기를 자주 하는 비굴한 인간에 속한다. 소설 속 인물들에게 돌을 던질 자격이 없는 자다. 그러면서도 그런 상황에 있는 타인에게는 함부로 조언한다. 비평한다. 나의 모순된 오만을 볼 수 있게 해 준 한강 작가에게 감사한다. 한편으로 위로와 힘도 얻는다. 예기치 못한 바람이 불어도 가보라고, 쉽게 멈추거나 피하지 말라고. 누구에게나 견디며 살아갈 이유가 있다고.
'니체는 <우상의 황혼>에 "살아야 할 이유가 있는 사람은 못 견딜 일이 거의 없다"라고 썼다. 먼저 이유가 있어야 한다.'(오스 기니스의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중에서)
- 헤리의 반려책 이야기
#헤리 #반려책이야기 #책을좋아하는사람 #책좋사 #책스타그램 #느림의독서 #반려책 #한강 #바람이분다가라 #문학과지성사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