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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렙백수 윤준혁 May 18. 2019

경주 속 삶과 죽음의 경계

#영화경주 #장률 #신민아 #박해일

  급하게 여행을 떠나기 위한 준비를 한다고 생각해보자. 평소 바쁜 생활을 하다가 간신히 떠나는 휴가일수록 생각은 깊어지고 준비는 길어진다. 알차게 보내겠다는 계획과는 달리 급 여행은 사진이라도 남기기 위해 부지런히 돌아다니게 된다. 예상치 못한 변수라도 만나게 되면 괜스레 짜증이 나며 여행에서 돌아오니 추억 대신 남는 것은 피로다.

  예전엔 나도 그런 바쁜 사람 중에 하나였고, 여행도 정말 대충 하는 편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기억 남는 여행은 철저한 준비 끝에 떠난 해외여행이 아니라 산행을 하다 들어간 식당에서 우연히 어느 글귀를 만났던 여행이다. 광주의 무등산 역사길을 걸어 올라가다 보면 다슬기 수제비가 맛있는 '분청 맛집'이란 가게를 만날 수 있다. 허름하면서도 정감 가는 가게의 입구에는 누런 절지에 나옹선사의 시(詩)를 만날 수 있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네

                                                                                                            - 나옹선사 -


                                                            청산은 날더러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날더러 티 없이 살라하네

                                                            사람도 벗어놓고 마음도 벗어놓고

                                                            물처럼 바람처럼 살다 가라 하네

                                                            청산을 날더러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날더러 티 없이 살라하네

                                                           욕심도 벗어놓고 아쉬움도 벗어놓고

                                                           물처럼 바람처럼 살다 가라 하네



  예스러운 느낌이 물씬 나는 이 시는 내 조부가 살아생전 가장 좋아하셨던 시였고 작고하신 이후에는 묘비에 새겨 언제나 함께하고 계신다. 어렸을 때는 감흥 없이 보고 읽었던 문자였다가 우연히 만난 것이 반가우면서도 살아생전 조부는 어떤 삶을 살았었나 하고 말없이 생각하게 만드는 문구다.


친한 형 장례식장에 들렀다 경주로 오게 된 최현(박해일) 기억 속의 춘화를 찾아 무작정 경주를 돌아다니기 시작한다.



인간은 속물이다.

  선배의 장례식에 참여하기 위해 중국에서 귀국한 최현(박해일)은 무작정 경주로 향했다. 중국에 있는 부인과 싸우고기도 했고 홀로 경주에 떨어진 최현은 외로움을 느꼈던 건지 대학교 후배였던 여정(윤진서)을 경주로 불러낸다. 최현의 전화를 받고 여정은 경주로 오게 되지만 이상하게 둘 사이는 냉랭하기만 하다.

  학창 시절 최현은 술 취한 여정을 범한 기억이 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나 경주에서 만난 지금 여정으로부터 당시에 임신했었다는 사실을 듣게 된다. 여정의 고백 이후 "왜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느냐?"라는 말 직후에 나온 "오늘 서울로 올라갈 거야?"라는 말은 최현이 속물임을 드러내 주는 표현이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최현만이 속물은 아니다. 최현이 잘생겨서 호감을 가지는 안내원, 연예인으로 알고 사진을 찍는 일본 관광객, 학자로서의 권위를 알고 나서 최현에게 접근하는 지방대 교수 등 영화는 최현뿐 아니라 인간 모두가 속물임을 보여준다.




최현과 여정의 모습 "내가 왜 왔을까...?" 하는 듯한 여정의 모습과 찜찜한 최현의 표정



  최현과 여정은 경주를 돌아다닌다. 확실히 연인의 모습은 아니다. 나란히 걷는 것이 아니라 여정이 앞서고 최현이 뒤따른다. 임신 사실의 고백으로 전세가 역전이 된 것도 있겠지만 '이제는 나의 의지대로 움직인다.'는 무언의 선고이다. 마치 길 한복판에서 벌어진 남녀의 싸움에서 남자의 잘못이 큰 경우 여성이 앞서고 남자가 뒤따르는 형태와 비슷하다. 앞선 사람은 뒷사람의 모습을 볼 수 없다. 돌아봐선 안된다. 신경이 쓰이는 것을 들켜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경주의 왕릉 모습


삶과 죽음의 경계

  최현(박해일)과 영민(김태훈) 그리고 공윤희(신민아)는 술자리가 끝난 후 어색한 산책을 한다. 그들이 향한 곳은 경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커다란 왕릉이다. 그곳에선 작은 소란이 있었고 최현은 윤희의 권유로 윤희의 집에 들어가게 된다. 윤희는 최현에게 경주의 주택 어디서든 저 커다란 왕릉이 보인다고 말한다.

  무덤은 죽음을 의미하고, 주택은 삶을 의미한다. 우리가 삶에서 죽음을 떼어놓는 것처럼 주택과 무덤은 공간적으로 분리되어야 한다. 하지만 경주는 주택 어디에서든 왕릉이 보이기 때문에 그 경계가 모호하다. 영화가 보여준 왕릉으로 소풍을 가고, 연애를 하고, 산책을 하는 모습은 우리가 아는 경건한 무덤의 모습은 아니다. 왕릉 못지않게 영화에선 죽음도 상당히 많이 나온다. 아는 형의 죽음, 모녀의 자살, 공윤희 남편의 자살, 오토바이를 탄 폭주족의 사고, 점쟁이 할아버지의 기묘한 죽음까지 우리의 일상에서는 죽음을 마주하기 힘들지만 경주라는 삶과 죽음이 모호한 곳에서의 죽음은 오히려 언제든 찾아올 수 있음을 말하는 듯하다.



풍자개의 그림


영화 속 풍자개

  영화 경주 속 인물, 장소, 물건 등을 살펴보면 왠지 모르게 중극을 느낄 수 있다. 그것도 고요한 밤 아래 맛 좋은 술과 어울리는 풍경이 그려진다. 베이징대 교수인 최현이 공자의 79대손인 공윤희의 찻집에 와서, 중국에서 유명한 황차를 마시고, "사람들 흩어진 후에 초승달 뜨고 하늘은 물처럼 맑다."라는 글귀의 풍자개 그림까지…  신민아의 동양적인 비주얼도 이 분위기에 한 몫한다.



황차를 따르는 윤희(신민아)의 모습 - <경주>


  영화 경주가 다른 영화와 다른 점이 있다면 특정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만들어진 영화라기보다는 특정 분위기와 정서를 담아내는 영화이다. 145분의 러닝 타임에 담아낸 것은 경주에서 최현이라는 사람이 보고 느낀 1박 2일이다. 수많은 날, 수많은 인물들을 담지 않아야만 최현이라는 한 사람의 생각과 감정을 충분히 담아낼만한 여유가 생긴다. 

  우리는 여행을 '좋은 일탈'에 비유하곤 한다. 여행을 떠나면 나를 가둬두는 일과 시간으로부터 잠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행은 어디로 가든지 상관없다. 여행의 참맛은 '어디로 가느냐'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이기 때문이다.

  여름이 다가왔다. 이번 여름엔 짧게라도 여행을 떠날 생각이다. 무엇인가 눈 안에 가득 담아내는 여행보다. 한 사람의 생각과 정서를 충분히 기록할 수 있는 시간을 갖고 싶다. 여러분에게도 권한다. 여행의 목적이 좋은 것과 멋진 것이 아닌 한 사람의 생각과 한 사람의 감정이 대상이 되는 여행을 말이다.



#허름한 허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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