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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렙백수 윤준혁 May 19. 2019

연인을 잊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

#영화중경삼림 #왕가위 #금성무 #왕조위 #임청하 #왕페이 #영화리뷰

  이별해 본적이 있는가? 그리고 다시 누군가를 사랑해 본적이 있는가? 영화 <중경삼림>은 이별하고 난 뒤 사랑했던 연인을 잊기 위한 아주 구체적인 방법을 보여준다. '중경삼림'의 뜻을 그대로 해석해 보면 중경이란 도시 숲 속의 4명의 남녀(금성무, 임청하, 양조위, 왕페이)가 풀어내는 이별과 사랑이야기다. 당시의 중경삼림 열풍은 잘생긴 금성무와 양조위 덕분에 통조림을 사모으거나, 제복을 입은 경찰과 인증샷을 찍는 유행이 번지기도 했다고한다.

  1994년에 개봉해 25년도 더 지났지만 당시 영화를 봤던 여성들은 잘생긴 양조위의 하얀색 메리야스와 면 팬티 차림의 모습이 그렇게 섹시해 보일 수 없다고들 말한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왕가위 감독의 다른 영화(화양연화, 해피투게더, 아비정전 등)에서도 메리야스와 면팬티의 조합을 볼 수 있다. 흰색 속옷 패티쉬라도 있었던 걸까? 아니면 순백의 속옷을 빼고 아무것도 걸치지 않는 남자의 모습이 사랑과 이별에 있어서 순수한 태도를 보여주기 위한 장치였는지도 모른다. 왕가위 감독의 영화에서 그 차림을 가장 많이한 배우 역시 양조위이다. 왕가위 입장에서 양조위는 순수한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완벽한 페르소나가 아니었을까?



경찰 233 금성무의 무습 - 영화 <중경삼림>


  영화는 경찰233(금성무) 부분과 경찰663(양조위) 2개의 에피소드로 나뉜다. 첫 번째 에피소드는 메이라는 여자와 헤어진 남자 경찰223이 패스트푸드점 앞에서 전화를 걸고있는 장면부터 시작된다. 자신의 생일이자 옛 애인과 헤어진지 딱 한달이 되는 5월 1일 그리고 그 날짜와 동일 유통기한을 가진 파인애플 통조림을 사서 모은 뒤 그녀에게 연락이 오지 않자 그 통조림을 다 먹으면서 그녀를 잊기로 결심한다.

  같은시각 마릴린 먼로를 연상시키는 금발, 선글라스에 레인코트까지 차려입은 마약밀매 중계자(임청하)는 자신을 배신한 마약 밀매업자를 제거한 뒤 술집을 찾게 된다. 그 술집에는 이별한 뒤 처음으로 들어오는 여자를 사랑하겠노라고 마음먹은 경찰223(금성무)이 있었고, 처음으로 들어온 그녀에게 작업을 걸게 된다.


비를 상징하는 레인코트와 햇볕을 가리기 위한 선글라스를 모두 갖추는 패션 - 영화 <중경삼림>


  오늘날 평범한 연애와 비교한다면 경찰223(금성무)의 모습은 헤어진 남자의 찌질함을 보여준다. 물론 헤어지고 나서 관심을 뚝 끊고 쿨한 모습으로 더 나은 삶과 사람을 찾아나서야 멋진 인간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이 영화를 보고나면 어쩌면 '원래 이별한 뒤의 모습은 찌질한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찌질함으로 표현하지만 사랑을 했던 사람의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좋아했던 음식인 파인애플 통조림을 먹으며, 그녀와 친했던 사람에게 안부를 묻거나, 괜한 김칫국도 한사발 마셔보며 이별한 사람의 소중함을 알게 된다.

  마지막에 경찰223은 한 여자에게 생일 축하한다는 메시지를 받게 된다. 물론 그것이 메이인지 아니면 노란머리 여자에게 온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이별이 가고 누군지 알 수 없는 새로운 사랑이 왔다.


영화 포스터 <동사서독 리믹스>


  영화<중경삼림>에는 유명한 탄생비화가 있다. 사실 이 영화는 동사서독을 찍다가 촬영에 지장이 있어서 두어달 정도 시간이 남게 되자 찍게 된 작품이다. 필름도 많이 남아 있던 터라 왕가위 감독은 놀기보다 찍는 것을 선택했고, 마치 크로키 하듯 대충 만든 영화가 바로 중경삼림이다. 왕가위 감독 스스로 야심작이라고 생각한 것은 <동사서독>이었지만 로맨스의 흐름을 탄 <중경삼림>의 반응이 조금 더 좋았다. 왕가위 감독 특유의 '핸들드 기법'이라고 불리우는 스케치 하는듯한 흐리게 거리의 모습을 표현하는 것은 이별이라는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잘 맞아 떨어졌다. 사실 감독은 별 생각 없이 찍어낸 것이라 말했다. 최근엔 '발전하는 감독'이라는 별명답게 이 기법을 좀처럼 볼 수 없다.


양조위와 금성무가 다시 만난 영화<적벽대전>


  앞선 글에서 왕가위 감독의 '흰 면 패티' 패티쉬와 함께 그의 페르소나 양조위에 대해 언급했다. 속옷만 입고 돌아다니며 혼잣말 하는 연기인데도 얼굴이 기억날 정도면 양조위는 정말 잘 생겼다. 그의 짙은 눈썹과 눈빛은 연기에 깊이를 더해준다. 그런 그의 눈빛연기가 가장 극에 달했던 영화가 바로 유덕화와 함께 출연했던 <무간도>라는 영화다. 중경삼림에 출연했던 양조위와 금성무가 훗날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했던 영화<적벽대전>에서 다시 모이게 된다.


  

양조위의 모습 - 영화 <중경삼림>


  중경삼림의 두 번째 에피소드에 면팬티를 입은 경찰633(양조위)을 볼 수 있다.경찰633은 패스트푸드점에서 언제나 똑같은 샐러드를 고른다. 그리고 이 패스트 푸드점에서 일하는 점원 페이(왕페이)는 이런 경찰 633을 짝사랑 하고 있다. 어느날 경찰633의 스튜어디스 애인이 이별의 편지와 함께 경찰 633의 집 열쇠를 왕페이의 가게에 맡긴다. 장을 보러 갔다가 동료와 식사하고 경찰633이 동료와 식사하고 있던 모습을 발견한 페이는 줄 편지가 있는데 나중에 우편으로 보내 줄테니 주소를 알려달라 말한다. 그렇게 경찰633의 주소를 알아낸 뒤 몰래 그의 집에 들어가 남아있는 전 애인의 흔적을 새로운 물건들로 바꾸며 흔적을 지우기 시작한다. 어느날 경찰633은 자신의 집이 조금씩 바뀐 것을 느끼게 되고 우연히 집안에 있는 왕페이를 발견하고는 호감을 느낀다.


보이쉬한 왕페이의 모습과 유명한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 - 영화<중경삼림>


  학창시절 금성무가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서 조깅을 통해 몸속 수분을 다 빼내려고 말한 것을 보고 손발이 오그라들며 "이게 뭐야?"를 거듭 말하며 시청을 거부했지만 곧 보이쉬한 매력의 왕페이가 노래 California Dreamin 노래에 춤츠는 모습을 보고 자세를 고쳐잡은 기억이 있다. 짧은 까치머리의 여자가 매력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처음 들었다.


 왕페이의 행동이 사랑스러운 우렁각시인지 현대판 주거침입일지 무슨상관인가? 양조위를 짝사랑했으면서도 나중에 캘리포니아에서 보자는 양조위의 제안을 거절하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왜 튕기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사실은 그 톡톡 튀는 모습이 극 중 왕페이의 매력이 아닌가 싶다.



사실 왕페이도 좋지만 커플로는 스튜어디스 역의 주가령이 더 잘 어울리는 것 같다. - 영화 <중경삼림>


  20년이나 된 영화를 오래전에도 보았고 이후에 약간 지루할수도 있는 왕가위의 일대종사를 보고나서 추억팔이 하고자 다시 찾게 된 영화 <중경삼림> 과거와 지금이 감수성의 농도가 다르듯 영화 <중경삼림>은 볼 때마다 해석이 달라지는 것 같다. 94년 개봉 했을 때도 '오글거리는 대사' vs '아름다운 대사'로 호불호가 갈렸던 영화다. 대표적인 예로 "나는 56시간 후에 이 여자를 사랑하게 된다.", "사랑에 유통기한이 있다면 1만년", "제일 처음 들어오는 여자를 난 사랑할거야." 등이 있다. 한편으론 '내가 살아가는 요즘 세상이 이런 로맨스를 기대 할 수 없는 회색이 되어버린 건 아닌지...'라는 생각이든다.

  영화 <중경삼림>은 확실히 이별과 사랑을 모두 담고 있는 영화다. 하지만 이별은 사랑이라는 다시 새로운 만남으로 이어지는 구조도 명확하다. 오글거리는 대사나 이해되지 않는 행동과는 상관없이 이별을 경험해본 사람들에겐 자체로 힐링영화가 되는 것이다. 내 주변엔 실제로 실연의 아픔을 극복하기 위해 금성무처럼 운동장을 뛰거나 편의점에서 통조림을 사모으는 친구들도 있었다. 그친구들은 지금 새로운 사랑에 빠졌다.


  이별을 했다고 해서 금성무처럼 운동장을 달리거나, 통조림 캔을 모아서 먹거나, 양조위처럼 빤스 차림으로 사물에게 말을 건다고 해서 반드시 사랑을 만나리란 법은 없겠지만 만약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그것이야 말로 영화가 아니겠는가? 지금까지도 <중경삼림>이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이유는 이별이란 통조림 캔 30개를 먹어야 할 만큼 괴로운 일이지만, 또 알고보면 생각만큼 별게 아니며, 금새 또 새로운 인연이 온다는 희망 때문이 아닐까?



#허름한 허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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