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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렙백수 윤준혁 May 27. 2019

인간으로서 완성을 꿈꾸는 것

#함평학교 #최진석 #철학 #노자 #수업을준비하며

  고대, 중세, 근대 … 도대체 시대를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최진석 교수는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의 서문에서 시대를 구분하는 기준은 철학적 의식의 변화에 있다고 한다. 고대는 탈레스나 헤라클레이토스가 그랬던 것처럼 궁극적인 존재에 대한 진지한 물음이 있었고, 중세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그랬던 것처럼 '신'이란 존재에 대한 물음이 있었다. 근대는 마르크스가 그랬던 것처럼 세계와 체제에 대한 물음으로 시대는 마무리됐다.

  그렇다면 현대를 대표하는 시대적 문제의식은 무엇일까? 우리가 현대라고 부르는 시대가 막을 내리고 새로운 시대가 와야만 "아 그 시대의 문제의식은 이거였구나!"라고 말할 수 있을 테지만 짐작컨데 '개인과 인간에 대한 탐구'일 것 같다. 여기서의 '개인'과 '인간'은 같은 듯 다르다. '개인'은 사회적 역할이고 '인간'은 나라는 주체이다. 예를 들면 높은 사회적 지위에 오른 사람이 세상이 요구하는 일을 수행하지만 그것이 철저한 이윤동기에 의한 행동이라던가 목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다른 개인을 파괴해야 한다면 그것은 사회적 역할에서의 성공일 순 있으나 나라는 주체가 파괴된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 아쉽게도 물질적 풍요를 이룬 현대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사회적 성공을 위해서는 노력하면서도 '완성된 인간'이 되기 위한 노력은 외면한다.

  나는 출세 혹은 부의 축적이나 꿈꾸는 것이 미덕인 현대의 상황에서 인간에 대한 스스로의 공부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기자가 된 한 후배의 표현을 빌린다면 '인간의 주체성을 가장 와 닿게 설파하는 학자'인 최진석 교수의『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을 연초에 만나게 되었다. 다시 한번 꺼내 든 책의 표지를 보자마자 몇 가지 의문이 생겼다.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다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 원래 노자의 말이니 노자의 목소리가 아닌가? 아무리 주석본이라고 해도 노자의 말과 무엇이 더 다를 것이 있는가? 내 물음에 최교수는 서문으로 대신 답을 했다.




노자의 여러 주석가들은 노자의 권위를 빌리면서도 정작 우리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것은 노자의 음성이 아니라 주석가 자신들의 음성이었다. 왕필은 왕필, 노자는 노자일 뿐이다. …… 이미 노자는 우리의 서술description 대상이 아니라 해석interpretation 대상이 되어 있다. 그래서 노자의 원래 음성을 들으려는 시도 자체가 또 하나의 해석을 첨가하는 기만술에 불과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 최진석, 2001년, 소나무, 8p



  주석서가 많은 탓에 노자철학을 제대로 공부하고 싶은 사람들은 주석가가 담아냈던 노자만의 말과 생각(노자의 원음)을 궁금해한다. 노자의 원음을 들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최교수는 '시대적 문제의식'은 무엇인지 '그 시대의 철학자들이 공통으로 탐구하던 문제가 무엇인지'를 알아보라고 덧붙였다. 최근 들어 철학자나 인문학자들이 '인간'을 탐구하기 시작한 것을 보면 '인간'이 현대를 대표하는 시대적 의제라는 일종의 힌트가 아닐까 생각한다.


  중국을 대표하는 사상 두 가지를 말해보라고 한다면 당연히 유가사상과 도가사상을 말할 것이다. 공자와 맹자로 대표되는 유가사상은 공맹사상으로 불리기도 하며, 마찬가지로 노자와 장자로 대표되는 도가사상은 노장사상으로 불린다. 유가철학과 도가철학의 이념을 살펴보면 상당 부분 상반된 내용이 많다. 유가사상은 중국의 정치이념과 결합해 사회윤리의 바탕이 됐다면 도가사상은 민간신앙과 결합해 생활 깊숙이 자리 잡은 삶의 지혜가 되었다. 그 때문에 유가철학은 출세의 학문이라면 도가철학은 자기 수양의 도구에 가깝다. 자기 수양하니 생각나는 일화가 있는데 어릴 적 재미있게 봤던 영화 속 도교의 영향인지 나를 비롯한 내 친구들은 도가철학을 속세를 떠나 신선이 되기 위한 수행 정도로 생각했다. 동물로 둔갑을 한다거나 자연의 힘을 도술로 부리는 영화 속의 도사들을 보며 도인을 꿈꾸는 괴짜들도 있었다. 노자가 나와 내 친구들의 모습을 본다면 한심하다고 혀를 끌끌 찼을 것 같다.


  유가와 도가를 조금 더 완벽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사상이 꽃피웠던 춘추전국시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170여 개의 나라였던 춘추시대를 맞이하자 공자는 주나라의 근본이 되었던 예의 정신을 지키는 것이 나라를 구하고 혼란을 막는 길이라 생각했다. 예는 계급을 인정하고, 제 위치에 맞는 일을 행하는 것이다.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아비는 아비답게, 자식은 자식답게라는 논어의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다르게 해석하면 제 위치에서 제 역할을 못했을 때는 형벌로써 다스리는 것이 예법이다.

  반대로 노자는 예법과 같은 인위적인 수단으로 백성을 다스리고, 형벌과 전쟁을 통해 천하를 통치하는 것에 의문을 가졌다. 공자와 노자가 살았던 춘추전국시대는 상대를 죽여서 이겨야만 나라를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나라가 전쟁을 치를수록 백성은 곤궁할 수밖에 없다. 군비에 쓰려고 가혹한 법으로 세금을 징수하게 되면 세금을 못 낸 백성들은 노역에 끌려갔다. 노역을 면제받기 위해선 군대를 가야 했고 그마저도 하지 않으면 형벌을 받았다.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하면 포로가 되어 노예처럼 살아야 하기 때문에 기를 쓰고 상대를 죽여야 했다. 백성의 삶은 피폐해져 없는 것이나 다름없지만 백성은 국가의 국방력이자 경제력이었다. 노자는 도덕경을 통해 전쟁을 위한 세금을 어떻게 징수할지 어떤 병법으로 싸워야 하는지만 고민하는 지식인들에게 경종을 울렸다.

  '나라보다는 나라를 이루는 인간 자체가 소중하다.'는 노자의 철학은 몇천 년이 지난 현대에도 유효하다. 미디어가 발달된 탓에 자극적인 기사를 자주 접하게 되는 까닭도 있겠지만 반인륜적인 범죄를 저지르는 기업가, 국민을 우롱하는 정치인, 생계형 범죄를 저지르는 국민부터, 빈곤한 삶을 비관해 자살하는 국민들의 기사를 보면 자본주의 체제하의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인간성이 버려지고 파괴되는지를 보여준다.

  어쩌면 유가철학과 도가철학의 정신은 시대가 바뀔 때마다 인류로부터 번갈아가며 선택되었던 것은 아닐까? '질서'를 통해 혼란을 바로잡고 '체제'를 유지할 순 있겠지만' 그로 인해 희생되는 '인간성'을 걱정해야 한다. 그리고 또다시 파괴된 인간성 회복을 위해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진다.

  국가와 체제는 너무 강력해져 버렸다. 인간이 만들었지만 인간을 초월한 힘을 가지고 있다. 때때로 국가는 이 힘을 활용해 우리들을 유린하기도 한다. 국가 스스로의 자정작용도 불가능해 보인다. 우리가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우리가 주체적으로 '인간다움'을 실천하는 방법뿐이다. 어쩌면 어느새 인간의 적이 되어버린 무자비한 국가와 체제와 싸우기 위해서는 인간다움을 넘어선 '완성된 인간'을 꿈꾸며 달려야 하는지도 모른다.



P.S 최진석 교수를 만나기 이전에 생각을 한번 정리해야 할 것 같아 본 글을 씁니다. 다음 화부터는 최진석 교수님과 함께 공부한 내용입니다.


#허름한 허세


본 글은 새말 새몸짓을 위한 '함평학교'에서 최진석 교수와 함께 학습한 뒤 느낀 점을 쓴 일종의 학습일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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