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에서 제일 신선했던 건 여성들의 시원한 옷차림이었다. 외모와 몸매에 대한 지적질 따위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 쿠바녀들의 걸음걸이는 그 자체로 매력적이었다. 아무리 큰 가슴도, 삐져나온 옆구리도, 걸을 때마다 흔들리는 거대한 뱃살도, 그들은 신경쓰지 않았다. 가슴이 깊게 파인 쫄티가 탄력 있게 받쳐주고 있는 엄청난 크기의 양쪽 가슴에 담배와 휴대전화를 꽂고 유유히 걷고 있는 쿠바녀를 보면 절로 그 당당함이 부러워졌다. 나도 은근히 셔츠 단추 하나 더 풀어봤다가 쩝, 다시 채웠다.
쿠바노들은 씃씃~ 그녀들을 향해 입으로 소리를 내다 그녀들이 한 번 쳐다보기라도 해 주면 지들끼리 좋아 죽는다. 지겨운 캣콜링에 나중엔 대꾸도 안 하게 되지만, 쿠바 여성들은 이력이 난 듯하다. 거리 곳곳에서 남녀상열지사의 경쾌한 에너지가 넘쳐난다. 말레꼰에서 서로를 감싸 안은 연인들. 남자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껄렁대면서 끈적한 눈길을 보내고 여자는 큰 가슴을 출렁이며 은근슬쩍 미소로 대답한다. 서로 농밀한 시선을 즐기고, 살이 늘어지거나 말거나 몸에 딱 붙는 옷을 입고, 누가 보거나 말거나 꼭 붙어서 서로의 몸을 즐긴다. 내일의 걱정 따위는 집어치우고 이렇게 서로 흥겹게 희롱하고, 눈 맞으면 사랑하고, 아님 말고 또 사랑할 대상을 찾고, 거칠 것 없이 유쾌하다.
이차성징 후 성에 대한 호기심이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몸을 가진 사람으로 태어났는데, 내가 자란 환경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춘기 여자아이에게 한국식 봉건주의와 기독교식 순결주의를 강요하며 성에 대한 죄의식만 잔뜩 안겨주었다. 비열하고 미천한 수준의 성교육 때문에 문제적 사춘기를 거쳐 문제적 성인이 된 후, 온갖 시행착오를 거치며 한국 여자로 살아온 나는 쿠바에서 자주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한국이라면 어땠을까. 남자들의 음흉한 시선은 대체로 두렵고, 여성의 유혹은 훨씬 용의주도해야 한다. 헤퍼 보여서도 안 되고 매력 없어 보여도 안 된다. 그리고 무조건 예뻐야 한다.
한국인들의 상대 외모에 대한 혹독한 마구잡이 지적질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특히 몇몇의 한국 여성들은 타인의 외모에 대한 평가질의 화술도 화려하지만 자기 외모에 대해 자책도 심각하다. 날씬한 애들도 지 뚱뚱하다고 안달이고 어디 어디 성형하면 좋겠다고 거의 전문가 수준으로 서로 충고해준다. 남자들끼리의 대화는 아름다움보단 성적인 부분만 부각되어 더 더럽다.
여행하면서 만난 한국 여성들 대다수는 성형수술 경험이 있었다. 왜 하는지에 대한 의문은 바보 같았다. 한국의 성형산업은 가히 세계 최고였다. 한국사람들 외모의 기준이 도대체 어디 있는지 모르겠으나, 외모에 대한 집착이 성형수술로 나타난 건 어쩌면 당연하기도 하다. 그래서 수술 후 갑자기 예뻐진 여자들이 자기를 대하는 남자들의 태도가 확 달라졌음을 상기된 표정으로 얘기할 때는, 좀 슬프기도 하다. 성형은 생존과 계급의 문제가 되어 버렸으니.
일부일처제 시장에서 좀 더 상품성 높은 남자에게 선택당하기 위한 간절한 노력은 생존 전략으로 읽힌다. 예쁜 여성이 가진 상품적 가치는 매우 크므로 계급 상승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하고. 외모에 집착하는 여성의 눈은 이미 대중매체나 남성 권력의 시선으로 오염된 색안경으로 가려져 있다. 그 색안경을 스스로 벗어 내려놓을 때까지 이 처절한 생존 의식, 계급의식에서 자유롭긴 쉽지 않다. 그래서 성공한 남자와 결혼하면 달라지나.
결혼은 제도이자 시스템이다. 그 제도 안에서 여성의 아름다움은 결혼 전까지 그 효력이 강력할 뿐이다. 보여지는, 평가받는, 남자를 흥분시켜야 하는 몸은 일부일처제를 유지할 남자를 확보한 후에는 밥 차리고 청소하는 몸, 애를 낳아 길러야 하는 몸이 되기도 하고, 상황에 따라 돈을 벌어야 하는 몸이 되기도 한다. 이때 그 몸은 더 이상 매력적일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어진다. 남자는 이미 다른 여자들의 몸을 쳐다보고 있을 가능성도 크고.
어쩌겠나. 젠더 권력을 잠깐 제쳐놓아도 우리는 아름다움에 집착한다. 오래 보아야 알 수 있는 들꽃의 아름다움 같은, 너 역시 그럴 수 있는 맥락 있는 아름다움이 아니다. 한국의 대중매체와 연예산업이 기초를 닦고 강남의 성형외과가 대중화시킨 그 아름다움 정도는 되어야 한다. 이성애자들만 따지고 보아도 지성을 가지고 자기 성찰을 할 수 있는 남자들의 예쁜 여자 타령도 별다르진 않다. 오히려 상대를 고를 수 없는 경쟁력 없는 사람들과 못생긴 사람들 사이에 사랑의 가능성이 더 다채로울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조건에 현혹된 생존 의식과 계급의식이 작동되지 않는다면 더 멋진 연애를 할 수 있을지도.
산티아고 데 쿠바는 쿠바 혁명의 발상지일 뿐 아니라 쿠바 음악이 시작하고 아프리카 특유의 리듬이 결합된 음악 쏜Son이 발전된 곳으로도 유명하다. 주말이면 거리 어디서고 작은 축제를 만날 수 있다. 작은 광장 큰 광장, 사람이 모이는 곳마다 음악과 춤이 함께 한다. 세스뻬데스 공원에 있는 대성당 뒷길로 이어지는 에레디아 길에는 다양한 살사 바가 있다.
카사 주인 부부를 따라가 본 현지인들의 살사 놀이터는 놀라웠다. 밤새도록 어우러져 지쳐 나가떨어질 때까지 춤출 수 있다. 어디 가든 눈에 띌 수밖에 없는 아시안 여자는 쉽게 춤 신청을 받는데, 내 평생 처음 거기서 살사를 추었다. 내 저주스러운 뻣뻣 바디도 춤출 수 있게 만들 정도로 쿠바노들의 춤솜씨는 굉장했다. 물론 몸들끼리 마찰도 대단하고. 그 상상을 초월한 부비부비 때문에 얼굴은 홍당무가 되고 진땀이 났는데, 나의 촌스러운 태도는, 아후 증말 부끄러워서, 다시는 살사를 추지 않으려 결심할 정도로 강렬하고 민망한 경험이었다.
사실 몸과 몸이 만나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행위는 오래된 인류의 의식이다. 말도 설명도 논증도 필요 없다. 굳이 이성이 부비부비 할 필요도 없다. 동성끼리도 아이도 노인도 두루두루 즐길 수 있는 게 춤인데, 춤 신청당할까 봐 뚱하니 구석에 숨어있는 나는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큰 즐거움을 빼앗긴 느낌이었다. 한국적 남녀상열지사의 진부함과 젠더 불균형, 자본에 포섭된 아름다움 등에 대한 복잡한 생각으로, 살사 바에서 모히또만 들이키며 춤 구경을 하다 착잡한 심경에 빠져들었다.
까사 데 라 뜨로바. 주로 외국인들이 가는 살사 바. 입장료를 내면 모히또 한 잔을 준다. 입장부터 통제되어 있고 고급진 연주하는 사람들도 전문 댄서들도 있는, 정부가 운영하는 살사 바다. 정부가 나서서 놀라고 판을 깔아 놓았다. 여기 연주자들과 댄서들은 공무원인 셈. 어릴 때부터 전문적인 교육을 받고 오랜 시간 훈련된 사람들이라 수준이 다르다.
여기선 누구든 나와서 무대를 채우고 춤을 출 수 있다. 드레스 코드를 맞춰 입는 사람들도 있지만 반바지에 운동화 신고 춤을 춰도 아무 상관없다. 춤 구경에 빠져있는데 흥겨운 살사 음악을 연주하고 노래하던 리더가 찡구아라찡구라 찡찡라~같은 이상한 소리를 내며 구석에 앉은 내게 마구 윙크를 보내더니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미소를 보냈다. 이게 뭐여? 했는데, 나를 중국인으로 알고 공연 도중 나름 관심과 배려를 보내준 것이었다. 산티아고 데 쿠바를 노래 가사까지 바꿔가며 ‘산티아고 데 치나 China’로 목청껏 불러 주었다. 얼결에 나도 손을 흔들며 쉐쉐~.
곡이 바뀌고 홀이 비워지자 여자 남자 댄서 한 명씩 등장해 멋진 춤솜씨를 보여준다. 절도 있으면서도 현란하고, 원피스 자락 한 모서리조차 연출된 듯 리듬감 있게 찰랑거린다. 아우! 뻣뻣한 내 몸도 엉덩이 들이밀고 싶은, 흥겹고 관능적인 춤이었다. 여자 댄서는 날씬한 초콜릿 색 아름다운 몸매에 활짝 펼쳐지는 하얀 원피스를 입고, 맘껏 춤추며 치마 자락을 흔들고 자연스럽게 자기 하얀 빤스도 보여준다. 야하지도 꼴리지도 않는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공연의 일부로 녹아들어 가 있을 뿐이다. 훔쳐볼 필요도 불법 촬영할 필요도 없고, 성폭행당할까 봐 두려워하지도 않아도 되는, 이 자신만만한 몸 앞에서 난 넋이 나갔다.
헤픈 여자라는 낙인 없이 성추행범들의 접근이 금지된 안전한 장소에서 저렇게 매력 넘치는 춤을 출 수 있는 곳은 무대뿐이겠지. 무대 아닌 곳에서 저런 춤은, 저런 손짓과 움직임은 왜곡되고 힘을 가진 이들에 의해 멋대로 해석되어 또 다른 낙인과 폭력을 불러올지 모른다. 그러니까 너가 조심했어야지, 같은 말들과 함께.
어렸을 때부터 옷차림과 행동 하나하나 통제당하고,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지 아느냐는 충고에 미리 겁을 먹고, 하루가 멀다 하고 뉴스에서 흘러나오는 여성 살해 기사에 쫄아서 몸을 어디다 숨겨놓고 다니고 싶었다. 또 한쪽에서는 여자다워야 한다고 했다. 예쁘게 차려입고 방긋방긋 웃으며 부드럽고 배려심 깊은 말투에 사근사근 예의 바르게, 겸손하게 상대의 말을 경청하고, 남자의 세상에 작은 손해라도 끼칠 생각이 없음을 작정한 표정으로, 똑똑한 여자 매력 없으니 잘나도 잘나 보이지 말라고 했다. 가정과 학교와 사회가 작정하고 서로 짠 듯이 비슷한 메시지만 주입시켰다.
나는 애완동물이 아니므로 그럴 수는 없었다. 주인이 사랑해주면 만족하고 그 손을 핥을 수 있는 개나 고양이가 아니라서, 인간으로서 자존감을 유지하며 살기 위해 사랑스러운 여자로만 머물 수는 없었다. 이성애 연애를 하면서 사랑하는 대상에게서 느껴야 하는 거리감은 나에게만 고통이었다. 같은 세상에 살고 있으나 결코 같을 수 없는 대상을 사랑해야 하는 고통. 존재 자체가 이리 비대칭적인데 사랑으로 묶여있다는 착각. 이런 것들을 어떻게 감수해야 하는가. 선택지가 얼마나 있는지 생각하기 전에 사랑받는 존재가 되길 포기했었다.
그러나 원래는 저리 자유롭고 아름답지 않았을까. 저 거침없이 황홀한 춤사위를 보니 내 것일 수도 있었으나 놓아버린 것들이 아쉽고 아깝다. 안전하다는 감각이 확장되고 그에 합당한 시스템이 더해져서 자유로워진 여성의 몸이 맘껏 상대를 유혹하고, 서로 사랑하고 아끼고, 뭐 그럴 수 세상을 볼 수 있을까. 그랬음 좋겠다. 나도 그 틈에 낑겨 좀 즐길 수 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