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여자, 아르메니아 대표 썅년

아르메니아 예레반, 여행 중 여행 회상

by 김성냥

아르메니아 예레반에서 귬리로 가는 기차 안. 버스 타면 더 빠르게 도착할 거리지만, 그래도 기차가 있으면 기차로 가는 게 좋아서 또 기차여행을 했다. 오래되고 낡은 기차. 지정좌석도 없고 예매도 필요 없어서 그냥 표 끊고 탔다. 전 날 예매하려고 기차역에 들렀건만 내일 그냥 다시 와, 라는 소리만 들었다.


저 작은 감열지가 기차표.

오래되어 곳곳이 녹슬고 삐그덕거리고 덜컹거리지만, 깨끗하고 좌석이 널찍하니 좋다. 붐비지도 않아 3인이 앉을 좌석을 혼자 차지하고 있다가 창을 열고 싶어 창문을 붙잡고 낑낑대고 있으니 누가 와서 열어준다. 고맙구르...


열린 창문에 기대어 한참 동안 여행 중 만난 사람들을 돌이켜봤다. 사실 아르메니아에서 만난 나쁜 여자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사람 때문에 예레반이 싫어졌고, 놓치기 싫은 오페라 공연이 있었지만 포기하고 예레반에서 벗어나는 길이었다. 하루도 더 예레반에 있기 싫었다.


여행하며 만나는 사람들과 좋은 일만 있을 순 없겠지. 사람들 때문에 힘들고 상처받고 또 위로받기도 한다. 사람들은 대체로 친절하고 좋았지만, 감당하기 어려운 사람들도 있었다.


여행자는 믿을 수 있는 게 본인의 감각과 인터넷에서 얻은 정보, 지도뿐일 경우가 많다. 인터넷에 안 나오는 좋은 식당 찾는 일부터 지도가 잘못 알려주는 길을 제대로 찾기 위해서도 현지인의 도움이 필요하다. 천 원도 안 되는 돈 때문에 얼굴 붉히고 싸울 때도 있고 문화가 달라 오해할 때도 있지만, 여행을 더 진지하고 풍부하고 재미있게 만들어주는 사람들도 그들이다.


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물론 내가 매력이 넘치는 인간이니 늘 주위에 좋은 사람들이 많았다고 나 혼자 생각한다. 그 와중에 속상한 일을 겪기도 했다.


그중 예레반의 대표 썅년 Irina. 그녀는 내가 알고 있는 악마적 유형의 인간을 다 소환할 정도였다. 그녀는 투어 회사가 소유한 아파트를 자기 것처럼 속였고, 부킹닷컴에 올라와 있는 잘못된 주소 때문에 내가 15킬로그램 넘는 배낭을 메고 두 시간 뺑뺑이 돌았는데도, 사과 한 마디 안 했다. 사과 대신 부킹닷컴 측에 항의하겠다고 했다. 마치 자기 잘못은 전혀 없는 것처럼.


짐 때문에 자기 사무실까지 택시 타고 오게 하고는, 숙소로 가는 택시는 택시 앱과 상관없는 이상한 택시를 불러 택시기사와 또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택시비를 4배 넘게 불렀지만 난 택시 앱에서 제시하는 금액만 줬다. 기사는 텍시 앱 얀덱스 욕과 내 욕을 같이 하며 사라졌다.


통화 중에 길거리가 시끄러워 잘 안 들리니 문자로 정확한 주소를 보내라고 해도 이를 무시했고(끝내 주소를 주지 않고 택시기사를 통해 해결하려 했다. 도대체 왜 그랬는지 지금도 의문이다. 투어 회사 측의 세금 문제나 법률문제가 얽혀있는 게 아닐까 추측만 할 뿐), 내가 왜 주소 안 주냐고 따지자 난 알아들을 수도 없는 긴 발음의 예레반 주소만 반복했다. 나중엔 자기 설명을 못 알아듣고 이제 와서 불평한다고 오히려 내 탓이었고. 내가 화를 삭이느라 입 다물고 있으니 영어 못 알아듣는 동양인 취급하면서 너 같은 투어리스트 첨 봤다고 막말까지 했다. 열받아 화를 내자 너같이 소리 지르는 사람하고는 대화 못 한다고 내게 훈계질이었다.


으아... 내가 그녀 말을 못 알아들었으면 그렇게까지 화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정말 능수능란했다. 잘못된 주소 탓에 한 고생은 부킹닷컴 탓이었고, 큰돈도 아닌 택시비로 따지는 난 진상 외국인이었다. 사과 한 번 받아보려 조근조근 질문하니 말귀 못 알아듣는 사람이 됐고, 화를 내니 분별없이 시끄러운 사람까지 됐다. 끝까지 상대의 약점을 이용해 자신의 허물을 덮는 데 사용하고, 자기 잘못에 대한 핑계를 남에 대한 비난으로 교묘히 전환시켰다.


나처럼 영어로 의사소통에 큰 불편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이렇게 당할 정도면, 영어 사용이 힘든 사람은 정말 억울하겠다. 대놓고 영어 못 알아먹는다고 쏘아대는 저런 년한테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을까. 너 때문에 낼 필요도 없는 택시비 두 번이나 냈다고 항의하자, 그녀는 그건 너한텐 스몰 머니잖아,라고 했지. 너 같은 사람 때문에 막 쓰라고 있는 스몰 머니는 아니거든. 사기꾼들은 어찌 그리 하는 말도 비슷한지. 나중엔 자기에게 너무 한다며 희생양 코스프레까지 했다. 어쨌든 나의 완패.


남의 약점을 잡아 자기 방패로 삼는 그 여자를 보며 한때 같은 직장에서 일했던 그놈 생각도 났다. 그놈은 승승장구했다. 어떻게든 사람과 상황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이용할 줄 알았으니까. 아! 이 인간도 성공 꽤나 하겠는데, 이런 생각. 어쨌든 그 년한텐 거기가 직장이었으니까. 생각할수록 화나고 유치하게 어떻게 복수할까 오랜 시간 고민했지만 내 시간, 내 감정만 아까울 뿐. 너 때문에 예레반이 싫어졌어, 란 문자 하나 남길까 말까 고민만 하다, 결국 소심하게 예레반을 떠났다.


그러나 문제는 나였다. 그 썅년이 한국에서 만난 악마적 유형의 인간들에 대한 기억까지 소환시켜 한 동안 많이 괴로웠다. 오랜 시간이 지나 잊혔다고 생각했던 상처까지 챙겨 와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었다. 아직도 과거 일들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음을 또 확인하느라 사실은 미련한 내가 싫어진 것이었는데, 괜히 예레반 탓을 한 것이다.


그렇게 예레반을 떠나던 길이었다. 기차 창가에 기대어 생각해보니 좋은 기억들도 많았다. 처음 예레반 버스터미널에 떨어졌을 때, 환전하고 심카드 사는 일이 그리 어려울 줄 몰랐다. 열 명이 넘는 사람에게 물어도 그냥 센터에 가라고 했다. 아, 센터는 어떻게 가냐고요. 묻다가 지쳐 한 여행사로 무조건 들어갔다.


나 조지아에서 방금 왔는데 환전하는 데도, 심카드 사는 데도 몰라. 의자에 앉아있던 한 여성은 역시 센터로 가라고 했다. 센터에 어떻게 가? 돈도 없어. 조지아 돈하고 카드밖에 없어. 징징대기는 나의 힘! 그녀는 불쌍한 나에게 400 드람을 쥐어줬다. 처음에는 200 드람짜리 동전 하나만 주길래 불안해서 하나만 더 달라고 했다. 그녀는 버스정류장 건너편에서 5번 버스를 타면 센터로 간다고 알려주었다.


버스비는 100 드람밖에 안 되지만, 나의 징징댐에 감동 감화된 것인지 무려 버스 4번 탈 수 있는 차비를 준 것이다. 나는 내가 까칠하고 새침한 인간인 줄 알았는데 이제 막 돈도 달래네. 흠흠. 내가 대견했고 선뜻 돈을 준 그녀에게 고맙고 또 고마웠다.


저 동전을 쥐고 나니 힘이 생겼다.


주타 트레킹을 같이 했던 소피와 펍에서 만나 신나게 맥주 마시고 있을 땐 옆자리에서 자신을 목수라고 소개한 사람이 우리에게 한 잔에 1000 드람이 넘는 맥주를 주문해주기도 했다. 공짜 맥주는 얼마나 더 맛있는 것인지, 달콤하기까지 하다. 고마워서 술김에 타령조 한국말 노래를 불러줬다. 좀 쪽팔렸지만.


미술관에 갔을 땐 한 그림에 감동받아 오래 보고 있으니, 그 그림이 인쇄된 카드를 선물이라며 전해준 미술관 직원도 있었다. 화가가 인도 여행 중 그린 그림이라는데 지금도 내 휴대전화 뒷면에서 나와 눈 맞춤하고 있다. 미술관 문 열어주러 왔다가 질문이 너무 많은 나 때문에 전시관을 돌며 아예 가이드를 해주기도 했지. 그녀에게도 진심으로 고맙다. 생각해보니 아르메니아엔 썅년보다 착한 언니들이 더 많았네.

이 그림, 화가가 인도 여행 중 그린 것이라 한다. 지금도 내 휴대전화 뒷면에서 나와 눈 맞춤하고 있다.


아르메니아에서 갑자기 쓰러졌을 때 가만히 있으면 아르메니아 사람들이 다 해결해 준다고 글로 쓰기도 했었어. 같이 이동한 여행자가 갑자기 쓰러져 구급차 불렀을 때, 그 의사 언니는 어땠고. 무표정한 얼굴로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해주고 숙소까지 데려다주었지. 처리 과정으로 A4 용지 한 번 접어 종이 뒷면에 영문 이름과 국적만 적은 게 다였다. 소비에트 연방 경험을 가진 국가의 놀라운 의료서비스인가. 병원비도 안 받고 쿨하게 굿바이~하고는 가버렸다.


원두커피 사 가지고 나올 땐, 중학생이나 됐을까 어린 친구가 한국말로 인사하며 예레반에서 행복한 시간 보내라고 축원해줬고, 구준표를 사랑한다며 자기 집에 놀러 와도 된다고 한 아주머니도 있었구나. 사진 도서관 사서 언니는 내가 예레반 여성들의 결혼 이혼 출산 낙태 종교 가족 동성애 같은 까다로운 질문을 쏟아낼 때도 친절하게 다 대답해줬고, 현지인만 아는 좋은 식당 리스트를 잔뜩 건네줬지.


그래 이렇게 좋은 사람들이 많았는데 난 왜 그 썅년 하나로 그리 괴로워한 걸까. 바보, 결국 내 문제였는데...


기차 창가에 기대어 여기까지 생각하느라 한 동안 시간이 흘렀나 보다. 창가에서 자리로 돌아가다 뒷자리에 앉은 여성과 눈이 마주쳤다. 미소와 함께 목례를 하고 자리에 앉았는데 그녀가 뒤에서 내 어깨를 두들긴다. 뒤돌아보니 머리가 길고 키위 모양의 유니크한 귀걸이를 한, 젊고 예쁜 여성이 갑자기 자기소개를 한다. 미술 공부를 하는 학생이고, 졸업 후 디자이너가 될 거라고. 응 그렇구나. 나도 간단히 내 소개를 하고, 난 귬리 가는데 넌 어디가? 물으니 집에 가는 길이라며 목적지가 근방이라 바로 내려야 한단다. 그리고 너에게 이 말하고 싶었어, 라며 내게 You're so beautiful, 이라 말했다. 응? 내가 뭔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멍한 사이, 내 손을 잡고 같은 말을 반복하고는 좋은 여행 하라며 마침 멈춘 기차에서 내려버렸다.


어벙벙. 그렇게 훌쩍 가버리면 어떡해.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말해줘야지. 아, 그래도 심미안이 있는 자로다. 내가 그러한 지 어떻게 알았을까. 흠흠. 어찌 나만 아는 나의 아름다움을 발견한 것인가. 너는.


풉. 온갖 좋은 아르메니아 여성들을 만나 놓고도 썅년만 가지고 고통받은 게 나의 수준이듯, 낯선 사람에게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는 그녀야말로 그녀 안에 아름다움에 대한 자기만의 아이디어가 있기 때문 아니겠는가. 내가 아니라 그녀가 아름다운 거겠지.


마음이 개운해졌다. 아름다움은 늘 감동을 주니까. 정체모를 푸근함과 함께 찾아온 뿌듯한 기분으로, 마음이 평안해진 채로 귬리에 도착했다. 썅년 따위는 잊어주마.


keyword
이전 06화그녀의 흰 빤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