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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냥 Aug 24. 2023

안 읽어도 되는 책들

<<최선을 다하면 죽는다>>

흑인 여성들의 책을 읽으며 한동안 그들의 목소리가 강렬하게 귓가에 맴돌았다. 백인 여성으로 퉁쳐지던 여성의 목소리에 그들은 명확히 얘기했다. 우리는 다르다고. 그러게. 흑인여성과 백인여성이 여성이라고 같은 경험을 할 수 있을까. 같은 경험을 했다 해도 인종문제는 깊게 그 문제를 재구성했을 것이다.

 

같은 인종 안에서 여성들의 경험은 계급적 요소를 더 강렬하게 띤다. 한 공간에서 함께 일한 여성들의 경험이 다 같을까. 여의도 중심가에서 빌딩에서 업무공간을 공유한 그녀들 중 한 명은 은행에서 이미 오래전부터 억대연봉을 받는 노동자였고, 다른 한 명은 그 건물을 청소하는 파견업체 청소노동자였다. 나는 그 둘과 친하게 지냈지만 그 둘이 만날 일은 없었다. 그 둘의 경험은 얼마나 다를까.

   

여성 내에 계급성 문제를 인식하면, 쉽게 여성이면 다 같은 편이라거나 멋있으면 다 언니, 같은 말을 경계하게 된다. 왜 차이를 무너뜨리려 하나. 얼마나 큰 간극이 있는데.


여성들이 쓴 책을 열심히 읽고 북토크도 만들고 응원하고 격려해 왔지만, 이제 거리를 둘 때가 온 것 같다. 사실 말 못 했지만 여성 저자의 책 중 함량미달인 것들도 많이 참아왔다.

  

책 엄숙주의 같은 말로 부를 수 있을 거 같다. 책은 책다워야 한다. 책은 종이에 인쇄되어 남는다. 흔적이고 기록이고 전해진다. 책에 남길 이야기는 그만큼 신중해야 한다. 가볍게 낄낄거리며 소비할 내용은 인터넷에 넘친다. 나무를 벨 필요도 없고. 그럴 내용이 책으로 나오면 좀 화난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는 새로운 가족 형태를 제안한 획기적인 이야기로 충분히 좋은 이야기였다. 지방에서 지하 월세방에 사는 여성이 이 책을 읽은 자기 느낌을 얘기하기 전까지는. 황선우, 김하나의 현실에 감정이입하는 데 문제가 없었다. 나 역시 서울태생에 서울에 있는 대학을 나와 대출받아 서울에 있는 아파트를 살 처지는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나의 계급성이었다. 나나 황선우, 김하나의 문제는 자기 경험이 보편적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보편적일 수 없다. 운이 좋아 서울에 태어나거나 아니면 서울진입이 가능해야 한다. 부모의 경제력이 나를 대학에 진학시킬 수 있어야 하고 좋은 직장이 보장된 좋은 대학을 갈 수 있어야 한다. 공부 잘하는 게 본인의 능력이기만 한가? 그저 공부만 잘하면 되는 환경 또한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 좋은 직장에 들어가는 것까지  많은 운 좋음을 가져갈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성찰은 나의 계급성을 통렬히 파헤처본 후에야 알 수 있었다. 난 성인이 될 때까지 서울 외에 다른 곳이 한국에 있는지 잘 실감하지 못했다. 이게 가진 자들의 계급성이다. 기본적으로 오만할 수밖에 없다. 자기 경험을 보편적인 듯 기록할 수 있는 것도 언어를 가진, 그들의 자기는 모르는 그 오만함 덕분이다. 서울 아닌 지역에서 지하 월세방에 사는 그녀가 황선우, 김하나의 생활이 얼마나 판타지 같은지 얘기해 주어서야 머리에 도끼를 맞은 것 같았다. 모든 지식은 중산층의 산물이라 해도 차분하게 생각하고 감안해야 할 것들이 있다. 그러니 글 쓰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위치성을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아야 한다.

    

이제 좀 늙고 가난해지니 저절로 깨닫게 되는 것도 있다. 중산층 여성의 허무맹랑한 세상인식은 어이없을 때가 많다. 비가 오면 집이 물에 잠겨 죽어가는 사람이 있는데, 12층 아파트에 살면서 내 주변엔 그런 사람 없던데,라고 얘기하는 여자를 보면 파리도 못 죽이는 나마저도 한 대 후려치고 싶은 생각이 든다. 늙고 가난해짐을 통해 책의 가성비도 더 따지게 되었다. 여자가 썼든 남자가 썼든 나에게 깨달음을 주지 않는 책은 이제 안 읽겠다. 시간도 돈도 아깝다. 말랑말랑 아기자기해서 감동이 넘치는 이야기는 둘이 만나서 카페에서 하면 안 되겠니?

 

선우 씨, 혼비씨 서로를 다정하게 부르며 이어지는 사랑스러운 이야기들, <<최선을 다하면 죽는다>>는 주변의 추천 때문에 보게 된 책이다. 지하철 화정역에서 내향형 인간들이 주고받는 세상 어색한 인사 얘기, 임산부석을 배려받기 위한 투쟁, 장례식 조화화환 보내기 등 아름다운 이야기는 넘쳤다. 그러나 이 책을 추천한 친하지 않은 그 지인은 책 추천 영역에선 손절이다. 황선우의 책을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멋있으면 다 언니>> <<최선을 다하면 죽는다>>까지 3권이나 읽었네. 이제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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