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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냥 Oct 04. 2023

여행 떠나는 날

공항으로 가는 버스 정류장

 새벽 1시가 되어서야 겨우 잠들었는데 새벽 3시 30분 엄마의 도마질 소리에 잠에서 깼다. 5시 30분까지는 자도 됐는데 다시 잠에 들지 못했다. 간헐적 단식으로 아침 거르는 거 이미 알고 있고, 전날 빈속에 비행기 타고 싶다고 말했는데, 엄마는 이미 이 새벽에 고등어까지 구워놓고 밥을 먹으라 한다. 상대가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주는 사랑. 상대가 원하든 원하지 않는 넘치기만 하는 사랑. 그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밥을 먹고 속이 불편한 채로 길을 나섰다. 하지 않는 거 뻔히 알면서도 새벽에 고등어를 굽는 마음이 어떤 건지 난 모른다.

 

밥먹이기는 엄마들의 운명인가. 얼마 전 읽는 글에서 요양원의 할머니들이 집에 간다고 보따리를 싸시는 얘기가 나왔는데,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도 잃어버린 여성들이 집에 가서 밥 해야 한다고 매일 짐을 싼다고... 누가 원했을까. 밥 먹이기를, 밥 하기를. 밥해 먹이기는 것 외에 다른 가능성을 빼앗긴 것처럼 집착해야 하는 밥해먹이기. 엄마의 밥해먹이기 노동으로 평생을 편하게 살아왔다. 살고 보니 마음이 많이 복잡하다. 미안하고 안쓰럽고 피하고 싶고 편안하지 않다. 만주에서 말 타고 천하를 호령할 성향을 가진, 똑똑하고 용감한 엄마의 평생을 밥 짓기 노동에 소모한 시간이  안타깝고. 지금에 와서 아무 소용없는 이야기지만, 엄마의 시간을 되돌려줄 수 있다면 내 인생도 많이 달라질 것이다. 많은 여성들이 그럴 수 있다면 한국 역사도, 인류의 역사도 달라질 것이다. 한 사람의 인생을 밥해먹이기 노동에 갈아 넣은 결과로 가장 큰 이익을 본 건 자본가다. 그들이 미안해하지 않으므로 내가 더 미안해하려니 속상하고 분하다.      


이른 아침의 풍경. 날은 환해졌고, 출근하는 사람들이 버스정류장에 모여있다 모두 가야 할 곳으로 떠났다. 양복 입은 젊은 남자 한 명을 빼고는 모두 중년의 여성들이다. 이들은 밥을 하지 않고도, 그 밥으로 누군가를 먹이지 않고도 집을 나설 수 있었을까. 하루를 또 다른 장소에서 노동으로 채워가야 할 일상이 남은 사람들. 이 사람들 속에서 공항으로 출발할 버스를 기다리는 나의 일상은 조금 뻔뻔한 것 같다. 노동에서 비껴가 있으므로. 뻔뻔해서도 또 미안하다.  



나와 나의 배낭만 남은 정류장. 낯선 거리, 낯선 공기, 낯선 잠자리, 낯선 사람들이 어떤 에너지를 줄까. 힘들고 피곤하고 또 때론 재밌고 신나겠지. 그 하루가 성실하고 그 나름대로 또 근사하다는 거. 그 속에 나의 웃음과 이야기를 상상해 왔다. 그저 시답지 않은 낄낄거림으로 시작된 첫 만남도 새롭고 진중한 이야기를 품고 있을 수 있으니까. 이 낯선 곳에서 또 다른 에너지를 품고 퍼지고 있을 테고. 날 만난 여행자 혹은 현지인들도 또 자기만의 이야기를 만들어가겠지. 나는 그래서 무슨 이야기를 더 써갈 수 있을까.  나도 궁금한 나의 이야기. 그리고 그 이유도 뻔한, 아직도 남아있는 불안과 죄책감. 심리상담사는 책임질 수 있는 건강한 죄책감으로 만들고 괴로움도 행복도 잘 섞어 승화시킨 후 Good Enough 단계로 가면 된다고 한다. 맞말.  


결국 영면한 밀란 쿤데라는 '인간의 삶이 아무리 찬란하고 아름답고 가혹해도 죽음 앞에서는 그림자일 뿐이다. 인간에게서 남는 것은 이야기뿐. 이야기만이 그 삶을 기억하고 그 고통과 기쁨과 슬픔을 살아있게 만든다.'라고 썼다. 그렇게 그는 살아있지 않은 상태가 되었지만 근사한 이야기를 남겼다. 나에게만 소중한 이야기들이라 해도 이렇게 소멸의 공포를 벗어나는 수밖에 없다. 영원회귀 되면 좋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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