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정의'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당신이 원하는 것은 공존인가, 상대의 파멸인가

by 헤르메스의 편지

“우리는 신의 뜻을 따를 뿐이다.”


1095년,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그 말을 믿고 칼을 들었다.

그들은 예루살렘을 ‘해방’하기 위해, ‘신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약탈하며 도시를 불태웠다.

이것이 바로 십자군 전쟁이다.

그 누구도 스스로를 악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모두가, 자기편이 정의롭다고 믿었다.


역사를 돌아보면,
가장 잔인한 폭력은 언제나 ‘정의’라는 이름을 달고 일어났다.


마녀사냥은 종교적 순결을 지키기 위한 ‘신의 정의’였고,

종교재판은 타락한 자를 심판하는 ‘신성한 의무’였으며,

프랑스혁명기의 단두대는 인민의 적을 제거하는 ‘정의의 도구’였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정치 이념의 갈등, 인터넷 속 ‘정의로운 분노’
모두 각자의 ‘옳음’을 내세우며 상대를 단죄한다.


이쯤 되면 묻게 된다.


“정의는 정말 선한 것인가?”


사실 정의는 감정과 매우 가까이 있다.
우리는 불의를 보면 분노하고, 피해자를 보면 연민하며,
그 감정을 ‘정의’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한다.


그러나 그 분노가

자기 확신에서 비롯된 것인지,

타인을 향한 증오를 정당화하려는 것인지,

혹은 진짜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인지,
우리는 좀처럼 묻지 않는다.


대부분은 연민과 분노에 휩싸여
그 감정을 일으킨 인물이나 집단을 찾아내고,
그들을 응징하는 데에 집중한다.


어느 순간, 나도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나는 지금, 정의를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상대를 단죄하고 싶은 것 아닐까?
그래야 내 안에 쌓여 있던 분노가 해소될 테니까.”


이건 꽤나 불편한 질문이다.
왜냐하면 내가 옳다고 믿을수록, 그 믿음은 점점 칼날을 날카롭게 만들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는 ‘정의’를 거울이 아닌,
누군가를 베기 위한 칼로 사용하는 데 익숙해져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에게 자주 질문을 던진다.

내 정의감은 감정에 휘둘리고 있지 않은가?

나는 상대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해봤는가?

그 사람의 입장에 내가 있었더라도 다르게 행동할 수 있었을까?

지금의 분노는 나의 도덕적 우월감을 위한 연료가 아닌가?

나는 정말 공공의 이익을 생각하고 있는가, 아니면 내 자존심을 지키려는 것인가?


이 질문들에 선뜻 답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 질문을 던진다는 행위 그 자체가,
내가 ‘칼’이 아닌 ‘거울’을 들고 있다는 증거일지 모른다.


예수는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치려는 무리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이 여인에게 돌을 던져라.”

(요한복음 8장 7절)

그 말 한마디에, 사람들은 하나둘씩 조용히 그 자리를 떠났다.

그 누구도 완전히 정의로운 사람이 아님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오해하지 마시라. 나는 기독교 신자가 아니다.
단지, 오래 전 어딘가에서 이 사례를 본 적이 있어,
이 주제를 떠올릴 때 생각났을 뿐이다.)


나는 여전히 누군가의 비겁함이나 무책임함을 보면 분노한다.
그들이 정의롭지 않다고 느끼고, 응당한 책임을 지길 바란다.


하지만,
그들을 단죄하고 싶은 욕망과,
내가 정의롭다고 믿는 감정 사이에는
항상 한 걸음의 거리가 필요하다는 것도 안다.


그 거리가,
우리를 ‘폭력적인 신념가’가 아닌
성찰하는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유일한 장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믿는다.
그 거리는 자기 성찰로 유지할 수 있다.


정의는 필요하다.
하지만, 정의는 방향이지 자격이 아니다.


누구도 정의를 독점할 수 없으며,
누구도 정의의 이름으로 타인을 모욕하거나 파괴할 권리는 없다.


정의는 누군가를 무너뜨릴 때가 아니라,
우리 모두를 살릴 때 가장 아름답다.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