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에서 계약은 무서운 행위이다.
현대에서 계약은 무서운 행위이다.
계약서에 서명을 한다는 건
내가 이 계약이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지,
잘못되었을 때 내가 어떤 피해를 입을지도
모두 이해하고 동의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의외로 사람들은 계약서에 서명할 때 그렇게 큰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자신이 무엇을 동의하는지,
나중에 문제가 터졌을 때 어떤 해악이 돌아올지도 모르면서
대충 싸인을 한다.
하지만 누군가와 계약을 맺는 일은 정말로 신중해야 한다.
내가 피해를 입지 않을 것이라고,
또는 나에게 이익이 될 거라는 상대방 말을 믿고 서명을 했을 뿐이라고 말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
문제가 터지면 상대방은 계약서를 들이밀며 이렇게 말한다.
“이거 다 동의하고 싸인하신거자나요. 계약할 때 다 동의를 구했고, 설명도 다 드렸습니다.”
피해자는 억울해서 소리친다.
“나는 이런 피해까지 동의한 적 없어요! 내게 유리할 줄 알고 한 거라고요!”
그러면 상대방은 태연히 받아친다.
“무슨 말씀이세요? 이 계약의 위험성도 다 설명드렸습니다.”
속에서 분통이 터지고, 자신이 꼼꼼히 챙기지 않았다는 후회가 밀려온다.
왜 그 때는 위험하다는 말을 듣고도 심각하게 고민을 안했는지 스스로가 원망스럽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이미 피해를 입었고, 어디에 호소해도 내 피해를 복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정부에 민원도 넣고 국회의원에게 하소연해보고 집회를 열어도 본다.
그러나 계약서가 족쇄가 되어 정작 법은 내 편을 들어주지 않는다.
정부에서 피해구제를 한다 해도 입은 상처와 손해는 온전히 회복되지 않는다.
이런 비극은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지만, 특히 금융회사와의 계약에서 자주 발생한다.
은행 대출, 보험 가입, 금융투자상품 가입 등 금융계약서들은 한결같이 복잡하고 어려운 말투로 쓰여 있다.
게다가 서명해야 할 곳은 많고, 자필로 써야 할 것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하나하나 꼼꼼히 챙기다간 내가 원하는 상품에 가입하는 데 하루가 다 갈 판이다.
이러한 설명서와 싸인은
개인들이 금융상품에 대해 잘 모르니 꼼꼼히 챙겨보고,
금융회사도 충분히 고객들에게 설명하라는 법령과 정부지침에 따라 생긴 절차이지만,
정작 계약할때는 서로가 귀찮고 성가신 절차일 뿐이다.
결국 사람들은 형광펜이 칠해진 부분만 보며 싸인을 하고, 요구하는 대로 적으며 넘어간다.
그러나 바로 그런 현실이 때로는 엄청난 비극을 초래하기도 한다.
실제로 그런 비극 중 하나가 있었다.
바로 2008년 즈음 한국을 뒤흔든 KIKO(Knock-In Knock-Out) 사태였다.
이 이야기는 수많은 중소기업들의 고민으로부터 시작했다.
당시 수출을 주력으로 하던 중소기업들은 환율 변동 위험을 줄이고 싶어했다.
해외에 물건을 팔면 달러를 받는데, 환율 변동에 따라
같은 돈을 받아도 이익이 늘기도 하고, 줄기도 하는 것이다.
중소기업들은 환율변동에 따라 이익이 늘쭉날쭉 하는 것보다
안정적인 이익을 얻는 것을 원했기에
환율이 고정된 상태를 더 선호했다.
이 때 환율을 안정적으로 고정시켜주는 상품이 있다고
은행으로부터 하나의 파생상품을 권유받게 된다.
이 상품의 이름이 바로 ‘KIKO’였다.
은행은 이렇게 설명했다.
“이 상품에 가입하시면 환율 오를 때 어느 정도 수익을 챙기시고,
내릴 때도 일정 수준 방어가 됩니다.”
중소기업들은 외국으로부터 받은 달러가치가 하락(환율 하락)하면
본인들의 이익이 하락하기에 환율이 내릴 때 방어가 된다는 말에 솔깃했다.
게다가 환율이 상승하면 이익도 생긴다니 금상첨화였다.
그래서 중소기업들은 은행을 믿고 서명을 했다.
하지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이 상품 구조가 너무나 복잡했고,
환율이 일정 수준 이상 급등하게 되면
무한대에 가까운 손실을 중소기업이 보도록 설계되어 있었던 것이다.
즉, 환율이 일정 수준을 넘어서 더 오르면 기업 입장에선 오히려 돈을 은행에 주어야 하는 구조였다.
가입한 많은 중소기업들은 그런 사실을 몰랐고,
혹은 설명을 받았더라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채 서명을 했다.
그리고 2008년 금융위기가 터졌다.
환율은 급등했고, KIKO의 ‘덫’에 걸린 중소기업들은 큰 손실을 떠안았다.
몇몇 회사는 파산하거나 큰 빚더미에 올랐고, 수많은 근로자들의 일자리까지 위태로웠다.
중소기업 입장에선 억울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단지 환율 변동을 없애고 싶었을 뿐인데, 어떻게 이렇게 큰 손해를 볼 수 있는 겁니까?”
하지만 은행들은 계약서를 내밀며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가입할 때 이런 구조 다 설명드렸습니다. 잘못되면 위험이 큰 것도 알고 계셨잖아요?”
이 사태는 소송전으로 비화되었고, 일부 소송에서 중소기업들이 부분적으로 승소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피해기업은 큰 손실을 떠안은 채 버텨야 했다.
이후 정부와 금융당국이 대책을 내놓았지만, 이미 터진 상처를 온전히 되돌리긴 어려웠다.
그렇게 KIKO 사태는 한국 금융 역사에서 “중소기업들의 비극”이자,
복잡한 금융계약의 위험성과 금융사의 책임 문제를 돌아보게 한 계기가 되었다.
KIKO 사태가 남긴 교훈은 분명하다.
아무리 금융기관 직원이 웃으며 친절하게 계약을 권유하고,
아무리 “괜찮아요, 다들 이렇게 합니다”라고 말해도, 그런 말만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오직 나 자신만을 믿고, 어떤 계약이든 하나하나 꼼꼼히 뜯어보며 냉정하게 판단해야 한다.
그리고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문제가 터진 이후에는 국회나 정부를 믿어도 소용없다는 사실을.
물론 피해자 구제 정책을 통해 손실 중 일부를 회복할 수 있고,
정치인이나 정부 관계자들에게 한두 마디 위로를 받을 수는 있다.
그러나 정작 나의 손해를 온전히 되돌려받을 수 있는 길은 거의 없다.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한 책임은 오롯이 나의 몫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극이 일어나면 규제가 강화되고,
정부의 관리감독도 강화되어
예전만큼 대형사고가 날 가능성은 확실히 줄어든다.
그러나, 여전히 계약의 부주의에 따라
개인이 피해를 보는 일이 완전히 없어지긴 어렵다.
살인, 강도같은 강력범죄를 아무리 금지시키는 법을 만들고,
경찰이 범죄자를 잡고, 범죄예방을 위해 노력해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니 애초에 계약할 때부터 누구보다 나 자신을 지키며 주의해야 한다.
금융계약이란 한 번 맺으면 나를 평생 옭아맬 수 있는 족쇄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