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를 읽으며
공감 가는 내용보다는 그러려니 하는 내용이 많았다.
나이가 들었다는 뜻일까?
다른 이의 슬픔에 깊이 공감할 수 없는 온정이 부족한 아저씨가 된 것은 아닌지 문득 생각하게 되었다.
글쓴이의 글을 보며 나 답게 산다는 것에 대한 나만의 정의를 생각해 보았다.
행복의 끄트머리라도 잡으려면 이렇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 나 혼자 그려보다.
-내게 꿈이란 무엇일까?
'꿈이 뭐예요?' 이런 질문을 던진다면 무엇이라 답할까? 사실 나는 놀고먹는 한량이 되어보고는 싶다. 하지만 쉽지는 않아 보인다. 내 성격상 가만히 앉아 있지를 못하는 편이라 책이라도 한쪽 보고 있든, 낙서 한 줄이라도 그리든 무언가를 자꾸 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내게 꿈이라기보다는 이렇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다. 그건 바로 "어제 보다 나은 오늘, 오늘보다 나은 내일"이다. 그리고 그런 모토는 나뿐만 아니라 내가 하는 일이나 사회에 대한 영향력도 그렇게 적용하려고 노력한다. 즉 나의 삶에서 하루하루 변화를 이끌어 내고, 타인의 삶이나 사회에 작은 기여라도 할 수 있다면 내 삶은 성공한 삶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나는 무엇을 기여할 수 있을까?"
-나의 기도, 나의 통제권에 집중하다.
고등학교 2학년에 처음으로 반장을 했었다. 남들 앞에 나서기를 싫어하는 내가 어떻게 반장을 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그 당시 나는 너무 내성적인 성격이라 아이들과 담임 선생님 사이에서 괴로워했던 기억이 있다. 나의 일기장에는 매번 힘들다는 말이 늘 적혀있었다. 그때 내게 힘을 주었던 글귀가 바로 이것이었다.
God grant me the serenity
To accept the things I cannot change;
Courage to change the things I can;
And wisdom to know the difference
Reinhold Neibuhr의 Serenity Prayer 중에서
신이시여 내가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온함을 주소서.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과감히 바꿀 수 있는 용기를 주소서.
그리고 이 두 가지를 구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나의 삶에 있어 할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인가?"를 늘 먼저 생각한다. 타인의 반응, 내 일의 결과 등은 내가 바꿀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오직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내일에서 최선을 다하고 나의 실수를 줄여가는 것 이외에는 없었다. 그렇게 생각을 바꾸고 나자 삶이 드라마틱하게 달라지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마음의 부담은 조금 덜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벽을 마주할 때마다 이 질문을 던진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부분은 어느 것인가?"
-화장실 청소 대신 양치 후 물 한 번 닦기, 사소해도 괜찮아
예전 악성 채무자의 빚 상환을 도와주는 사람의 조언을 읽은 적이 있다. 채무가 너무 많이 쌓여서 회생이 어려운 이들에게 그의 조언은 이랬다. 이율이 높은 것보다 원금이 작은 것을 먼저 상환해라. 상식적으로는 맞지 않는 말이다. 이율이 높은 그러니까 이자가 많이 나가는 것을 갚아야 경제적으로 이득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돈의 회계가 아닌 마음의 회계를 먼저 생각했다.
3천만 원짜리 5% 대출보다 백만 원짜리 10% 대출을 먼저 갚는다고 생각해보자. 백만 원의 대출은 그나마 갚기가 조금 더 쉽다. 한 달에 50만 원을 갚는다면 두 달, 한 달에 10만 원을 갚는다면 10 달이면 끝이 난다. 그렇게 빚의 끝이 금방 보인다. 하지만 원금이 큰 대출은 언제 갚을지 마음의 회계에서는 끝이 보이지 않는다. 마음의 회계에서 작은 만족감을 느낄 수 있는 작은 채무에 집중했을 때 빚을 갚을 동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미 해군 대장 William McRaven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자신감이 떨어졌을 때 이부자리부터 개라. 이부자리 정리는 누구의 도움 없이 나 혼자서 할 수 있다. 그런 작은 행동이 나도 무엇인가 할 수 있다는 의욕을 고취시켜 준다. 그리고 눈 앞에 정리된 이부자리라는 결과물이 보인다.
나도 그래서 인생에 사소한 변화를 늘리려고 한다. 양치를 하러 갈 때마다 양치가 끝나면 세면대에 물을 한 번 닦아본다. 길어야 5초 남짓도 걸리지 않는다. 그러다 조금 시간이 있으면 변기 주위도 닦아 보고, 바닥에 떨어진 먼지도 줍는다. 그렇게 아주 사소한 행동이 조금 더 깨끗한 화장실을 만들어 준다.
공부나 책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다. 공부하려고 하기보다는 늘 옆에 책을 놓는다. 그러면 잠시 시간이 빌 때 머리가 복잡할 때 책을 펴게 되고 단 한 줄, 한 페이지라도 공부를 하게 된다.
"사소함이 모이면 사소하지 않다."
-행복하게 살자. 그런데 언제 행복해?
나는 행복하게 사는 삶을 꿈꾼다. 하지만 행복이 무엇이냐는 질문에는 답할 자신이 없다. 행복이라는 추상적인 단어는 하루 만에 답할 수 있는 수학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행복을 찾기 위해 일기를 쓴다. 나 자신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고 있을 수는 없다. 내가 어떤 것을 보았을 때, 어떤 것을 경험했을 때 좋은 반응이 일어나는지 계속 실험하고 일기장에 그 실험 결과를 적어나간다. 그렇게 나의 인생에 좋았던 실험은 다시 시도를 한다. 마치 정답을 찾을 때까지 과학 실험을 하듯 계속 시도해 나가며 인생에 좋은 점들을 늘려나간다. 여러 실험을 하다 보니 내 인생에 행복에 가까운 지점은 무엇을 가졌을 때가 아닌 경험을 함께하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어렴풋이 든다.
"행복은 결론이 아닌 과정이다."
-부정보다 긍정을, 비관보다 낙관을 선택하자
질문으로 시작해 보자.
"내 주변에 빨간색 물체가 있었을까?"
달력의 빨간 공휴일
전화기의 빨간 알림 버튼
태극기의 빨간 동그라미
크롬의 빨간 원
한글 프로그램의 빨간 로고
책을 두르고 있는 빨간 띠
생각보다 주변에 빨간 물체가 많았다.
하지만 빨간색을 의식하지 않으면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
평소에 우리는 뇌가 습관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만 보는 선택적 집중 상태에 있다.
이 뇌를 의식적 집중으로 돌려야 한다.
그러려면 '나는 무엇을 의식하는가?'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어야 가능하다. 내가 바라보는 삶의 관점이 내 인식을 결정한다. 그러니 가급적이면 좋은 것을 생각하며 바라보자.
"나는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는가?"
-꼰대는 입으로 말하고 어른은 행동으로 말한다
본인은 하지 않으면서 말로만 좋은 말을 하는 사람을 꼰대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말하기에 앞서 그럴 자격이 있는가 되묻는 편이다.
나이가 많고 적음이 꼰대의 기준은 아니었다.
나이보다는 그가 가진 생각, 태도,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수용할 수 있는 자세가 어른의 척도였다.
나의 아버지는 나와 동생에게 공부하라는 이야기를 단 한 번도 하신 적이 없다.
하지만 늘 책상 앞에 앉아 본인이 스스로 공부를 하는 모습을 보여주셨다.
그래서 나는 '나이와 상관없이 사람은 늘 공부해야 하는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자연스레 책을 읽고 공부를 하게 되었다.
"쓰레기를 치우라고 하기 전에 내가 먼저 주워 버리자."
한 달 동안 잘 쉬고 돌아왔습니다.
독자 여러분 너무 반가워요^^
완성도에 대한 부담이 늘 가득하지만
앞으로도 꾸준히 써보도록 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