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가들의 독서법
책을 손에 들고 첫 장을 넘기는 순간은 언제나 설렙니다. 하지만 마지막 장을 덮고 며칠이 지나면, 읽었던 내용이 안개처럼 사라지는 경험, 저만 하는 건 아니겠죠? 특히 저는 세법 개정 관련 서적을 읽고 나면 꼭 이런 생각이 듭니다. "분명 중요한 내용이었는데, 대체 뭐였더라?" 공들여 읽은 내용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건 여전히 아쉬운 일입니다.
오래전 티타임스에서 대가들의 독서법을 소개한 글이 있었습니다. 읽다 보니 "아, 내가 책을 제대로 읽지 못한 이유가 여기 있구나" 싶더군요. 세상을 바꾼 천재들의 독서법은 저마다 독특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지식을 내 머릿속에 체계적으로 심는다'는 점입니다.
리처드 파인만의 방식은 솔직히 처음엔 번거로워 보였습니다. [정의]-[인출]-[설명]-[구분]-[반복]의 5단계라니, 책 한 권 읽는데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죠. 그런데 막상 해보니 제 무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더군요. 최근 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을 공부하면서 이 방식을 써봤습니다. 책을 덮고 백지에 제가 아는 걸 다 쏟아냈는데, 고작 서너 줄 나오더라고요. "이게 뭐야?" 싶어서 다시 책을 펼쳤습니다. 그리고 이번엔 누군가에게 설명하듯 써봤어요. 그랬더니 "여기가 막히네?" 하는 지점이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그 구멍 난 부분을 다시 공부하고, 또 설명해 보고. 귀찮긴 했지만, 확실히 머릿속에 남았습니다.
빌 게이츠의 방식은 제가 늘 하고 싶었지만 잘 안 됐던 거예요. [틀]-[칸막이]-[배치] 방식이죠. 그는 책을 읽기 전에 마음속에 지식의 큰 틀을 만들고, 새로운 정보를 알맞은 칸막이에 차곡차곡 배치한다고 합니다. 레고 블록 조립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문제는 제가 이 '틀'을 만드는 걸 자꾸 건너뛴다는 겁니다. 바로 세부 내용부터 읽으니까 정보가 산발적으로 흩어져서 나중에 기억이 안 나는 거였어요. 최근에 AI 관련 책을 읽을 때 의식적으로 먼저 목차를 보고 큰 틀을 머릿속에 그려봤습니다. "이 책은 AI의 역사, 기술, 윤리 문제를 다루는구나." 그러고 나서 읽으니 확실히 달랐어요. 각 장을 읽으면서 "아, 이건 윤리 칸에 들어가는 내용이네" 하고 분류가 되더라고요.
엘론 머스크의 나무 비유는 제게 경종을 울렸습니다. [의미의 나무]-[큰 가지]-[작은 가지]-[나뭇잎]. 그는 세부적인 나뭇잎 정보에 집착하기 전에 전체 나무의 줄기와 큰 가지를 먼저 파악하라고 합니다. 저는 그동안 나뭇잎부터 주워 담으려 했던 거죠. 당연히 가방 속에서 나뭇잎들이 뒤섞여 버렸고요. 요즘 블록체인 기술을 공부하는데, 처음엔 '해시함수가 뭐고, 분산원장이 뭐고...' 세부 용어부터 외우려다가 머리만 아팠습니다. 그래서 방향을 바꿔서 "블록체인의 핵심 원리는 뭐지?"부터 잡았어요. '탈중앙화된 신뢰 시스템'이라는 줄기를 먼저 이해하니, 나머지 세부 개념들이 그제야 제자리를 찾더군요.
이 대가들의 독서법에서 제가 발견한 공통점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그들은 모두 목적을 가지고 능동적으로 읽습니다. 멍하니 글자만 따라가는 게 아니라요. 둘째, 모두 '계층 구조'를 활용합니다. 빌 게이츠의 틀, 엘론 머스크의 나무줄기, 파인만의 주제 정의. 모두 정보를 대분류에서 소분류로 체계화하려는 시도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저는 아직도 이 방법들을 완벽하게 적용하지 못합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그냥 쭉 읽어버릴 때가 많아요. 하지만 중요한 책일수록, 시간을 들여서라도 이렇게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식을 수동적으로 받아 적는 게 아니라, 내 머릿속에 적극적으로 설계하고 구축하는 거죠. 정보를 인출하고, 설명하고, 분류하고, 연결하는 이 번거로운 과정이, 망각이라는 자연의 섭리 속에서도 읽은 내용을 붙잡아 둘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것 같습니다.
다음에 책을 펼칠 때는, 그냥 빨리 읽고 덮는 대신, 제 머릿속에 작은 나무 한 그루를 심어봐야겠습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