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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앞의

슬플 줄 알았다면 열지 않았을 텐데

나는 소설을 잘 읽지 않는 편이다. 삶에 어쩌면 조금이라도 쓸모가 있어 보이는 실용서 위주의 책들을 읽어왔다. 그런 내게 지인 한 분이 메마른 내 마음을 위한 책이라며 한 권의 소설을 추천했다. 프랑스 작가 로맹 가리가 에밀 아자르라는 가명으로 쓴 "자기 앞의 생"이었다.


한동안 그 책을 펼치지 못했다. 소설이라는 것이, 특히 누군가 "당신 마음을 위해" 권하는 소설이라는 것이 괜스레 부담스러웠다. 실용서를 읽을 때처럼 무언가를 배우고 정리하며 넘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어느 날 저녁, 나는 그 책을 펼쳤다.


어린 모모의 눈으로 시작되는 이야기는 처음엔 낯설었다. 한 소년이 바라보는 세상은 내가 살아온 세상과는 너무 달랐다. 로자 아줌마라는 늙은 창녀가 운영하는 양육소에서 자라는 아랍계 소년. 그 아이가 겪는 일상은 내가 경험해 본 적 없는 삶의 무게를 담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페이지를 넘길수록 모모의 목소리가 내 안에 스며들었다. 그 작은 아이의 눈을 통해 바라보는 세상은, 어쩌면 내가 외면하고 싶었던 현실의 민낯이었다.


"어릴 때는 차라리 모르고 지내는 게 더 나은 일들이 많이 있는 법이란다"-13페이지


세상을 살아가는 기술이 아닌, 살아간다는 것 자체에 대한 이 진실 앞에서 나는 내가 그동안 무엇을 피해왔는지 깨달았다. 어쩌면 내가 실용서만 고집해 온 이유도, 이처럼 가슴 아픈 진실을 마주할 용기가 없어서였는지도 모른다.


책을 읽는 동안 나는 모모 그 자체가 되었다. 늙어가는 것, 잊히는 것, 버려지는 것에 대한 로자 아줌마의 두려움이 어린 모모의 담담한 목소리를 통해 전해질 때, 나의 눈시울도 덩달아 붉어졌다. 그 아이는 너무 이른 나이에 삶의 어두운 이면을 알아버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더욱, 사랑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그 헌신과 순수함 앞에서, 효율과 쓸모만을 따지며 살아온 나의 메마른 삶이 부끄러워졌다.


"완전히 희거나 검은 것은 없단다. 흰색은 흔히 그 안에 검은색을 숨기고 있고, 검은색은 흰색을 포함하고 있는 거지" - 96페이지


실용서는 늘 명확한 답을 제시했지만, 삶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모모는 이미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선과 악, 희망과 절망이 뒤섞인 회색빛 인생이야말로 진짜 삶의 모습이었다.


마지막 장면을 향해 갈수록 나의 마음은 더욱 무거워졌다. 이야기가 어떻게 끝날지 짐작이 갔기에, 페이지를 넘기는 손이 자꾸만 느려졌다. 하지만 모모가 피할 수 없는 현실을 끝까지 감내했듯, 나 또한 이 슬픔을 정면으로 마주해야 했다.


결말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아팠다. 슬프다는 말로는 부족한, 삶과 사랑, 그리고 이별의 무게가 한꺼번에 짓눌러왔다. 모모가 끝까지 지켜내려 했던 사랑과 결국 떠나보내야 했던 상실감 사이에서 나는 눈시울을 붉혔다.


"나이가 들면 현실을 점점 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희망과 포부 대신 자꾸만 있는 그대로의 현실만 생각하게 된다"는 문장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현실적'이고 '실용적'이라는 이름으로, 삶의 희망과 순수한 감정을 포기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이 소설을 읽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계속 그렇게, 효율적이지만 메마른 삶을 살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모모와 로자 아줌마의 애틋한 사랑을 통해, 내 마음속 어딘가가 조금은 부드러워진 것 같았다.


정말 결말이 슬플 줄 알았다면 이 책을 열지 않았을까? 지금 돌이켜보면, 슬픔이야말로 내가 가장 필요로 했던 감정이었는지도 모른다. 때로는 슬픔 속에서만 만날 수 있는 삶의 귀한 진실들이 있으니까. "자기 앞의 생"은 그렇게, 쓸모를 따지는 삶 속에서 내가 잃어버렸던 것들을 돌아보게 하고, 메마른 내 마음에 지울 수 없는 깊은 흔적을 남겨준, 슬픔을 기억하게 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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