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첫 독서 [허삼관 매혈기]
헌혈증을 손에 쥐었을 때의 그 묘한 가벼움을 아직도 기억한다.
어린 시절, 여러 번 헌혈차에 올랐다. 자의였는지 타의였는지 그 경계는 이제는 흐릿하다. 군대에서의 헌혈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부대 앞마당에 세워진 헌혈차에 순서대로 올라, 그 안에서 빠져나간 내 피의 대가는 빵 한 조각과 음료수였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젊은 직원들은 좀 참여해달라"는, 거절하기 어려운 그 부드러운 강요 속에서 나는 다시 팔을 걷어 올렸다. 내 피가 빠져 나가고 12,000원짜리 영화 관람권이 손에 쥐어졌다.
그렇게 받은 헌혈증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아픈 이를 둔 지인에게 건네졌다. 그때도 나는 내 피의 대가가 가볍다고 느꼈다.
하지만 허삼관의 피는 달랐다.
소설 속 그가 받은 35원이 정확히 얼마의 가치인지는 알 수 없다. 영화 관람권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그러나 생계를 이어가는 데 간신히 도움이 되는 그 정도의 무게이지 않았을까? 아마도 지금의 35만 원쯤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그 돈은 가족의 한 끼이자, 아들의 생명이었고, 내일을 향한 희망이었다.
피를 팔고 난 뒤 허삼관이 먹는 돼지간볶음과 황주 두 냥. 솔직히 돼지간볶음이 그리 맛있는 음식처럼 느껴지진 않았다. 우리의 순대볶음 같은 것이 아닐까라고 짐작만 할 뿐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한 조각을 먹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예전에 선지를 먹었던 기억이 났다. 피를 굳혀 만든 음식, 소의 피로 만들어진 그 음식은 맛보다 먼저 촉감이 떠올랐다. 씹는 순간 입안에서 사라지듯 풀어지던 그 느낌. 삼킨다기보다 받아들인다는 말이 더 어울렸던 음식이었다. 피를 판 뒤 입안에 퍼지는 돼지간의 맛이 어떤 것인지, 그 무게가 어떤 것인지 알고 싶었다.
내가 아는 황주는 평범한 청주가 아니라 은은한 향이 감도는 술이다. 그러나 허삼관이 마신 황주는 단순한 술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은 빠져나간 피를 채우는 의식이자, 스스로에게 건네는 위로였을 것이다.
나의 피는 빵과 영화표로 바뀌었지만, 허삼관의 피는 생의 무게로 환산되었다.
그 차이를 생각하면 헌혈증의 가벼움이 새삼 무겁게 느껴진다. 우리는 같은 빨간 피를 흘렸지만, 그 피가 담아낸 절실함의 온도는 달랐다. 나는 그저 주었고, 그는 팔아야만 했다. 나는 선택할 수 있었고, 그는 선택할 수 없었다.
소설을 읽으며 문득 궁금해졌다. 만약 내가 허삼관의 시대를 살았다면 나 역시 피를 팔았을까? 가장이라는 무게 앞에서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아마도 팔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의 나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무게로 내 피를 바라보았을 것이다.
피삯이란, 어쩌면 같은 피라도 누군가에게는 나눔이고, 누군가에게는 생존이었기에 처해진 상황에 따라 전혀 다른 무게로 느껴지는 것이 아닐까? 그 간극을 이해한다는 것은, 소설 한 권을 읽는 일을 넘어 그 사람이 처한 절박함을 함께 바라보는 일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