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 물었다]_아나 아란치스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았지만 개인적인 생각을 담아 작성한 글입니다. ]
태양이 하루의 일과를 다하고 바다로 들어가기 직전, 붉은 노을이 바다를 뒤덮는다. 사람이 죽는 그 순간도 생의 일과를 마치고 죽음으로 들어가기에 일몰 직전의 석양이 생각났다. 우리의 죽음도 빛나는 노을처럼 생의 마지막 순간에 아름답게 마무리할 수 있으면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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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라는 조금 무거운 주제의 책을 읽으며 과거에 썼던 글이 떠올랐다. 꿈에서 내일 죽어야 한다고 신이 물었는데 나는 하루라도 더 살게 해달라고 애원을 했다. '살아야 할 이유는 무엇이냐?'라는 질문에 나는 제대로 답을 하지 못했다. 세상이 더 나아지게 하는데 작은 도움이 되겠다고 답했다. 하지만 정작 내가 아니면 못할 그런 일이 무엇이냐고 묻는 질문에 딱히 답할 말이 없었다.
누구에게나 다 통하는 만병통치약은 없다. 죽음을 앞두고 있든 앞으로 살 날이 많이 남았든 생의 중심을 관통하는 일관된 교훈은 없다. 사람마다 가진 아쉬움이 다르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다르기에 분명 후회하는 모습이 각기 다른 모습일 것이다. 그나마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후회 5가지를 책에서는 말하고 있다.
1. 나는 왜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느라 자신만의 삶을 살지 못했을까?
2. 소중하고 중요한 사람들에게 사랑한다고 이야기하지 못했을까?
3. 소유와 축적을 위해 물질적인 것들에 매달리느라 내 인생을 왜 일에 붙들려 살았을까?
4. 나의 진가를 알아주는 친구들과 왜 더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했을까?
5. 더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었는데 왜 그러지 못했을까?
반대로 삶을 잘 사는 가장 쉬운 방법은 이런 후회를 뒤집으면 될 일이다.
1. 스스로 선택하기
2. 사랑하는 사람에게 감정을 표현하기
3. 일하는 동안만이 아니라 삶 전체에서 의미 있는 일을 하기
4. 소중한 친구들과 함께 하기
5.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기
이 책을 읽으며 기억에 남았던 생각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 어설프게 종교를 믿는 사람보다 무신론자가 낫다.
죽음이라는 거대한 장벽 앞에서 인간은 종교를 의지하게 된다. 종교에 의지해 부디 살려달라는 기도를 하겠지만 그 기도는 죽음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하게 해 달라는 기도였다면 조금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죽음 앞에서 살려달라는 기도를 하다가 자신이 믿는 절대자가 자신을 버렸다는 생각에 오히려 종교를 믿는 사람이 무신론자보다 더 힘들어했다는 저자의 말이 이해가 되었다. 나는 종교를 믿지는 않지만 신은 믿는다. 어쩌면 그런 절체절명의 순간에는 종교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봤다.
두 번째, 어쩌면 죽음은 퇴직과 많이 닮아 있다.
퇴직과 죽음, 이질적인 두 가지가 의외로 공통점이 많았다.
둘 다 사전 예고 없이 갑자기 찾아온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맞이하게 되면 그 상황을 힘들게 맞이해야 한다. 영원히 오지 않을 거라 생각하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찾아온다. 누구나 마주하지만 서로 이야기하기를 꺼린다. 나는 괜찮다고 하지만 정작 자신의 차례가 돌아오면 당황하게 된다.
자발적 퇴직이든 비자발적 퇴직이든 무언가를 그만둬야 한다는 마음에는 아쉬움이 서린다. 그 아쉬움은 퇴직을 앞둔 시점에서야 자신이 일한 시간에 대한 회한과 함께 같이 찾아온다. 퇴직하기 전에 진작 퇴직 이후의 준비를 잘할 걸 하는 그런 아쉬움은 퇴직 직전이 되어서야 생각하게 된다. 죽음 역시 마찬가지다. 죽기 직전이 되어서야 잘 살아볼걸. 조금 더 행복하게 살 걸. 열심히 살 걸. 사랑한다고 말할걸. 삶에 대한 후회가 죽음 직전에 밀려온다.
책장을 덮으며, 죽음이 나에게 질문을 던진다면 어떠 질문을 할까라는 고민을 했다.
"당신의 죽음은 준비되었나요? 아니면 갑자기 마주할 생각인가요?"
나는 이 질문에 무엇이라 답해야 할까? 책을 덮으며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살아 있는 동안 무엇을 해야 후회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