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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상예술가 정해인 Oct 25. 2023

물건이 사라진 자리, 그림이 남다

오래된 그림에서 추억을 떠올리다

  아침 출근길 항상 가방을 메고 다녔습니다. 책을 읽기 위해서라도 가방을 들고 다녔지요. 그날은 책 대신 그림 노트를 들었습니다. 지하철 선반 위에 놓인 가방을 그려보았습니다. 낡아진 가방은 사라지고 그 이후로 두 번이나 가방이 바뀌었습니다.

"인사동에서 아내에게 사줬던 가방

며칠 전에 기분전환한다며 꺼내왔다.

아주 비싼 명품 가방은 아니지만

함께한 추억이 있기에 특별하다."


  옆에서 그림을 본 아내가 타박했던 그림입니다. 사무실 근처였던 인사동으로 왔던 아내에게 2만 원짜리 가방을 하나 사주었지요. 가방을 그린 그림을 보더니 2만 원짜리 가방 하나 사주고 너무 생색내는 거 아니냐며 그림으로 봐서는 매우 특별한 가방처럼 보인다고 했었지요. 몇 년이 지난 지금 이 가방은 사라졌습니다. 천으로 된 가방이라 찢어지는 바람에 현재는 없어졌지요. 10년 전에 샀던 가방의 추억을 그림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홍콩에서 아내가 가지고 있던 지갑이었습니다. 지갑의 느낌을 살리고 싶었는데 생각만큼 잘 살려지지 않더군요. 그래도 지갑의 느낌은 남아 있기에 그림으로 남겨두었습니다. 하지만 지갑은 낡아버려 이미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100일 동안 100일 그림을 그리는 동안이었습니다. 집안 구석에 찌그러져있던 가방이었지요. 원래 용도는 등산 가방이었는데 정작 가방의 용도라기보다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철이 지난 옷을 넣어놓는 용도로 쓰였지요. 한국에 돌아와서 더 이상 쓸모없게 된 가방은 재활용 상자로 들어가서 없어졌습니다.

https://brunch.co.kr/@hermite236/852

  마트에서 장을 보러 간 가족들을 기다리며 잠시 앉아 있습니다.

  그림을 그릴 펜도 마땅하지 않고 종이도 없습니다. 식당에서 받은 종이에 볼펜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마트 카트, 가방, 노트, 물병, 소파까지 그림을 그리는 제 손까지 담았습니다. 마트의 카트를 가져오지는 못했지만 순간의 기억은 그림으로 저장했습니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있더라도 그림은 항상 그릴 수 있다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습니다. 기록이 기억을 지배한다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내가 지닌 물건들은 시간이 지나면 없어지지만 기록은 계속 남아있지요. 지나가는 순간을 기록으로 남겨야 물건은 없어지더라도 기록은 오래도록 살아있겠지요. 며칠 놓았던 그림을 다시 그려봐야겠습니다. 지금 제 앞에 있는 물건들이 언제 저를 떠날지 모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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