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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모회의 청일점

학부모 위원 후기

by 일상예술가 정해인

학교 체육관 맨 앞 줄 의자에 10명의 후보가 앉았습니다. 10명의 후보 중 5명을 뽑는 학부모 위원회 투표 자리였습니다. 10명의 후보 중 유일한 아버지였죠. 주변은 온통 어머니들의 조용한 수다와 간간이 울리는 웃음소리로 가득했습니다. 그 사이에서 저는 섬처럼 외로웠지요. 애초에 지원하지 말걸 그랬나 하는 작은 후회가 밀려왔습니다.


"다음은 정해인 학부모님의 소견 발표가 있겠습니다."


사회자의 목소리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습니다.


무대로 올라서자 백여 명의 시선이 한꺼번에 쏟아졌습니다. 마른침을 삼키며 연단에 선 저는 준비했던 첫인사를 잊어버렸습니다. 잠시 머뭇거리다 떨리는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지요.


"안녕하십니까. 정해인이라고 합니다."


저의 목소리가 체육관에 울려 퍼졌습니다. 눈앞의 빛이 순간 흐릿해졌다가 돌아왔습니다. 처음 준비했던 무거운 내용을 포기하고 썰렁한 농담으로 시작합니다.


"연예인 정해인 씨와 이름만 같고, 얼굴은 많이 다르네요."


웃음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옵니다. 긴장으로 굳어있던 어깨가 조금은 풀렸습니다.


"어머니들만 지원한 자리에 제가 불청객으로 자리 잡은 건 아닌지 걱정됩니다. 여러 어머니들과 달리 지금껏 저는 학교와 관련된 자리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


무대 아래를 둘러보니 백여 명의 어머니들 사이에 아버지는 고작 세 명뿐이었습니다. 그들의 눈빛에서 같은 부담감과 동시에 응원을 읽을 수 있었지요. 준비했던 말들이 머릿속에서 흐트러졌습니다. 어머니들의 표심을 어떻게 얻어야 할까? 화려한 말솜씨도, 특별한 경력도 없는 나는 무엇을 내세워야 할까?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솔직한 이야기를 해 보기로 했습니다.


"저는 오늘 유일한 아버지의 시선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은 어머니나 아버지나 동일할 것입니다. 그러나 각자 다른 시선으로 아이들을 바라봅니다. 이 다양한 시선이 모여 우리 아이들을 더 넓게 품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어머니들의 표정이 조금씩 바뀌어가는 것이 보였다. 단순한 호기심에서 관심으로, 그리고 공감으로.


"어릴 적 제 아버지는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자식은 부모의 언어가 아니라 행동을 보고 따라 한다'라고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어릴 적 아버지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습니다.


"그 말씀처럼 저도 아이에게 학교에서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아이가 학교를 더 사랑하고, 배움을 즐기고, 친구들과 어울리는 법을 배울 수 있도록, 아버지로서 제가 먼저 학교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려 합니다."


마지막 말을 마치고 무대에서 내려올 때, 박수 소리가 체육관을 가득 채웠습니다. 끝났다는 생각과 후련함에 가벼운 발걸음으로 내려왔습니다.


기다림의 시간이 길게 늘어졌습니다. 학부모들에게 투표용지가 나눠지고, 모아지고, 개표가 진행되는 동안 시험발표를 앞둔 수험생처럼 목이 늘어지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투표 결과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사회자의 목소리에 시선을 들었습니다. 사회자 선생님은 투표 결과가 집계된 자료를 슬라이드에 띄웠습니다.


"1번 위원 23명, 2번 5명.."


처음에는 제 이름이 보이지 않아 떨어졌으리라 생각했습니다.


"46명, 최다 득표로 선정된 5번 정해인 학부모님입니다."


제 눈으로 보았지만 결과가 믿기지 않았습니다. 주위 어머니들은 "최다 득표시니 위원장님 아니신가요?"라는 축하 인사를 보냈지만 제 귀에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저는 다음 행사를 위해 얼른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앞으로 그저 한 아이의 아버지가 아니라, 수많은 아이들의 학교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위치가 되었다는 생각에 부담이 많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무대 위에서 느꼈던 떨림과 아이를 향한 사랑이 이 책임을 감당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힘을 내보았습니다.


창밖으로 보이는 학교 건물이 점점 멀어졌습니다. 앞으로는 학교에 더 자주 가게 되겠지요.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그리고 학부모 위원으로서 어떻게 활동하게 될지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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