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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라는 사치

화가 날 때마다 생각합니다

문득 창가에 비친 내 얼굴이 보였다. 찡그린 미간과 굳게 다문 입술. 화가 났던 모습이 거울에 담겨 다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불현듯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분노라는 감정은 참으로 묘한 사치다. 순간적으로는 시원하고 개운하지만, 그 대가가 너무 크기에.


화를 내면 순간 시원하다. 가슴에 맺힌 응어리가 풀리고 묵직했던 가슴이 한결 가벼워지는 듯하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 단순하고 위험한 결정이다. 당장의 선택은 바로 일어나는 감정에 지배받기 마련이고, 순간의 쾌감은 종종 인간관계를 악화시키거나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초래하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언젠가부터 나는 분노가 차오를 때마다 잠시 숨을 고르고 감정이 사그라드는 시간을 기다리게 되었다.


분노의 순간에 이성적으로 판단하기란 쉽지 않다. 이럴 때 다니엘 카너먼의 이론이 떠오른다. 그는 우리의 사고방식을 두 가지로 나눴다. 즉흥적이고 감정적으로 빠르게 작동하는 시스템 1과, 이성적이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느리게 사고하는 시스템 2. 화가 날 때마다 나는 시스템 2를 떠올리며 감정의 충동 대신 이성적인 판단을 하려 노력한다.


하지만 언제나 쉬운 일은 아니다. 비 오는 날, 창가에 맺힌 물방울처럼 내 마음속에도 수많은 감정의 물방울이 맺힌다. 그중에서도 분노의 물방울은 유독 빠르게 흘러내려 다른 감정들까지 함께 쓸어가곤 한다. 그래서 나는 하나의 방법을 만들었다. 화가 나는 순간에 잠시 멈추고 1일 후, 1년 후, 10년 후의 나를 떠올리는 것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10년만 어렸으면 그 정도는 일도 아니야."

"내가 그 나이 때면 날아다녔어."


오히려 나는 반대로 생각한다. 과연 10년 후의 나는 지금의 나에게 어떤 말을 할까? 은퇴하고 10년이 지난 70살의 나는 30년 전의 나에게 무슨 조언을 건넬까? 아마도 지금 화를 참는 이 순간을 위로해 줄지도 모른다.


우리의 분노는 마치 손등에 새겨진 주름살과 같다. 시간과 함께 희미해질 수도 있고 깊이 남을 수도 있다. 그 흔적이 깊게 남을지, 옅게 스쳐 지나갈지는 오롯이 지금 내 선택에 달려 있다. 과거는 돌이킬 수 없고, 미래는 예측하기 어렵다. 오직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현재의 나, 지금 이 순간뿐이다.


고민이 깊어질 때마다 스스로에게 묻는다.

"60살의 해인 아저씨는 무슨 조언을 할까?"

"80살의 해인 할아버지는 무엇을 가장 후회할까?"


어느 흐린 날, 희미한 창문 너머로 회색빛 하늘을 바라보며 다시금 생각했다. 분노는 언제나 우리 곁에 있지만, 그것을 어떻게 다루느냐가 중요하다. 분노를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분노와 함께 걸어가는 법을 배우는 것이 삶의 지혜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 다만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다. 삶이라는 긴 여정 속에서 분노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구름 한 점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구름이 몰고 올 폭풍을 막을 수 있는 건 오직 지금 이 순간의 나뿐이다.


아마도 죽기 전까지 계속 이 말을 하지 않을까 싶다.

"지금도 늦지 않았어."


매일 아침 거울 속 나를 바라보며 속삭인다. 부디 후회를 최소화하는 내가 되길, 오늘의 분노가 내일의 후회로 번지지 않기를. 그것이 내가 나 자신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 아닐까. 화가 나는 순간에도, 내 안의 이성이 깨어나 분노라는 사치를 내려놓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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