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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교 교주

자신만을 믿는 사람

어제 이야기했던 고참 세무사님과 저녁 노을로 창가를 물들이던 늦은 오후에 카폐에서 마주 앉아 있었다. 따뜻한 아메리카노 두 잔 사이로 흐르는 이야기는 어느새 종교에 관한 이야기로 흘러들었다. 흰 머리카락이 반짝이는 그의 관자놀이를 보며, 나는 무심코 그의 신앙에 대해 물었다. 그의 대답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나만교 알아요?"


처음에는 농담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진지했다. 자신만을 믿는 종교, 나만교. 그 이름이 내 귓가에 맴돌았다.


어린 시절 불당에서 향 연기를 맡으며 자란 그는, 학창시절에는 교회 찬송가를 불렀다고 했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새로운 영적 탐색으로 증산도에도 함께 가보았다고 한다. 그렇게 다양한 종교의 풍경을 지나온 그가 마침내 닿은 곳은 다름 아닌 '나만교'였다.


"신을 믿는 건 자유죠. 전 다만 현재를 믿어요. 사람은 누구나 현재에서만 존재하죠. 신이 있더라도 우리는 현재의 순간에 알지 못해요. 그래서 전 나를 믿고, 현재를 믿고, 지금을 믿어요."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내 머릿속에 예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순간의 깨달음이랄까? 나는 언제나 미래에 대한 불안과 과거에 대한 후회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말한 '현재'는 내가 정작 놓치고 있던 것이었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깊이 생각했다. 가로등 불빛 아래 쌓여 있는 낙엽들,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지는 고요한 거리, 그 모든 것이 '지금 이 순간'이라는 작은 우주를 이루고 있었다.


어쩌면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찾아 헤매고 있는지도 모른다. 저 멀리 있을 답을, 누군가가 가르쳐줄 진리를, 책 속에 숨겨진 깨달음을. 그러나 그 세무사님이 말한 '나만교'의 진리는 의외로 단순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서 있는 이 자리에서 '나'를 믿는 것.


사실 깊이 생각해보면, 우리가 정말로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과거는 기억 속에서 계속 변형되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우리가 진정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지금'뿐이다. 세무사님의 '나만교'는 어쩌면 그 단순한 진리를 다시 일깨워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대학 시절, 나는 단전호흡 동아리를 이끌며 깊은 내면의 여정을 시작했다. 고요한 호흡의 리듬 속에서 내 존재의 중심을 찾으려 했다. 날숨과 들숨 사이의 미세한 공간에서 어떤 진리를 깨우치려 노력했다. 폐 속으로 들어오고 나가는 공기의 흐름만으로도 우주의 섭리를 느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호흡을 다스리면 다스릴수록 늘 무언가 채워지지 않는 빈 공간이 마음속에 남아있었다. 그 공허함은 어쩌면 내가 미래의 구원이나 깨달음을 찾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카페에서 마주 앉은 그 세무사님의 백발이 햇살에 반짝이던 그 순간으로 다시 돌아가본다. 그의 눈빛은 맑았고, 웃음소리는 따뜻했다. 온갖 경전과 교리를 통과해 온 그가 마침내 찾은 답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었던 것이다.


"나만 믿는다는 말이 처음에는 이기적으로 들릴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자기중심적인 사고가 아니라, 자신의 현재 경험과 판단을 신뢰하는 태도에 가깝다. 인생의 모든 선택과 결정은 결국 '지금 이 순간'의 나로부터 시작된다.


창밖으로 석양의 빛이 스러져갔다. 커피잔 속 검은 물결이 잔잔해지고, 세무사님의 눈가에 주름이 깊게 보인다. 그 주름은 마치 세월의 지도처럼 그의 인생 여정을 담고 있었다. 불교에서 기독교로, 증산도를 거쳐 마침내 '나만교'에 이른 그의 영적 여정처럼.


어쩌면 우리는 모두 각자의 '나만교'를 찾아가는 순례자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순례의 끝에서 우리가 만나는 것은 다름 아닌 '지금 이 순간의 나'일 것이다. 그 깨달음이 비로소 나의 마음에 작은 평화를 가져다주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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