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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라는 클라이언트

삶의 우선순위

오늘도 스마트폰 속 구글 일정표는 빼곡히 채워진 약속들로 가득하다. 파란색, 초록색, 보라색으로 색칠된 시간들은 오롯이 '클라이언트'를 위한 공간이다. 지난 토요일은 중요한 거래처와 골프, 수요일은 신규 고객과 저녁 식사, 목요일은 해외 거래처와 화상 회의... 화면을 위아래로 스크롤하며 일정을 확인하다 보니 어느새 내 삶은 타인의 시간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저녁 노을빛을 바라보며 문득 깨달았다. 내 아이가 언제부터 이렇게 컸는지, 아내의 웃음소리가 언제부터 이렇게 낯설어졌는지. 오후 다섯 시, 사무실 창가에 앉아 도시의 불빛이 하나둘 켜지는 풍경을 바라보며 문득 우리 집 거실이 생각났다. 지금 쯤이면 아이들은 학원에서 돌아왔을 테고, 아내는 저녁 준비를 하고 있겠지. 그들의 일상이 내게는 흐릿한 풍경화처럼 멀게만 느껴진다.


지난 주중, 아내로부터 짧은 메시지가 왔다. "오늘 저녁 모두 함께 식사하기로 했어요. 당신은 못 오는 거죠?" 그 순간 가슴 한편이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당신은 못 오는 거죠?'라는 물음에는 이미 답이 정해져 있었다. 마치 내가 이 가정에서 소외된 사람처럼, 이미 나의 부재가 당연한 일상이 되어버린 것만 같았다. 그날 밤, 미팅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식탁 위에 아빠를 위해 남겨진 외로운 간식 통을 바라보며 나는 생각했다. '나는 언제부터 이 가정에서 손님이 되었을까?'


돈을 벌고, 성공을 이루고, 높은 자리에 오르는 이유가 무엇일까? 나는 가족의 행복을 위해서라고 굳게 믿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가족의 행복을 위한다는 그 여정 속에서 정작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은 뒷전으로 밀려나 있었다.


어느 날 밤, 오랜 친구와의 술자리에서 그가 내게 물었다. "네 인생의 가장 중요한 클라이언트는 누구냐?" 난 잠시 생각에 잠겼다. 가장 큰 계약을 맺은 회사? 아니면 가장 오래 거래해 온 파트너? 친구는 내 고민을 지켜보다 작은 미소와 함께 말했다.


"가장 중요한 클라이언트는 바로 네 가족이야."


그 순간, 무언가가 내 마음속에서 울렸다. 그동안 나는 수많은 약속과 미팅에 내 시간을 할애하면서도, 정작 가장 소중한 '클라이언트'에게는 제대로 된 시간을 내주지 않았다. 가족이라는 이름의, 평생을 함께할 가장 중요한 클라이언트에게.


다음 날, 나는 구글 일정표를 새롭게 작성했다. 매주 화요일 저녁과 일요일 오후는 붉은색으로 '가족 약속'이라고 표시했다. 그 시간만큼은 어떤 미팅, 어떤 거래, 어떤 중요한 고객도 끼어들 수 없는 시간이 되었다. 처음에는 어색했다. 화요일 저녁, 평소라면 중요한 고객과 식사를 하고 있을 시간에 아이들과 식사를 하고 있자니.

하지만 아이의 웃음소리, 아내의 따뜻한 눈빛, 그리고 우리가 함께 나누는 소소한 대화 속에서 나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행복을 다시 찾았다. 전화기를 끄고, 이메일을 확인하지 않는 그 몇 시간은 마치 다른 세계에 온 것처럼 평온했다.


이번 주말, 나는 가족들과 함께 평범한 저녁 식사를 했다. 특별한 이벤트도, 화려한 외식도 아닌 집에서의 소박한 식사였다. 아이들에게 학교 생활은 어떤지, 요즘 관심사는 무엇인지 물었고, 아내에게는 그동안 힘든 일은 없었는지 귀 기울여 들었다. 큰 아이가 필요하다던 새 문제집을 함께 사러 가고, 작은 아이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사러 늦은 밤 아이스크림 가게에 다녀오기도 했다. 그토록 단순하고 평범한 일상이 중요한 순간이라는 것을 놓치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양이 아니라 질이다. 매일 몇 시간씩 함께한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관계가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짧은 시간이라도 온전히 마음을 담아 함께하는 순간들이 더 깊은 연결을 만든다. 일주일에 단 두 번, 그러나 그 시간만큼은 오롯이 가족만을 위한 시간으로 채워 넣는 것. 그것이 내가 찾은 작은 해답이었다.


삶은 끊임없는 선택의 연속이다. 무엇에 시간을 쓰고, 무엇을 우선순위에 둘 것인가. 성공과 부, 그리고 인정받는 삶도 중요하지만, 그 모든 것의 근원에는 사랑하는 이들과 나누는 따스한 시간이 있다. 가족이라는 클라이언트를 위한 약속은 절대 미루거나 취소할 수 없는, 내 인생에서 가장 귀한 약속임을 이제야 깨닫는다.


오늘도 나는 스마트폰을 열어 내일의 일정을 확인한다. 빼곡한 약속들 사이에서 붉은색으로 표시된 '가족 약속'이 내 눈에 들어온다. 그 작은 글씨에서 나는 가장 큰 행복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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