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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 화생방 훈련

외부의 문제는 내부를 결속시킨다

우리 집에서는 묵은지 김치통이 등장할 때면 비상사태가 발생한다. 오늘도 그런 날이었다.

저녁 시간, 식구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오늘의 메뉴는 따끈한 감자탕. 뽀얀 국물에 깊게 우러난 감자탕 한 그릇이면 하루의 피로가 싹 가시는 법이다. 하지만 무언가 허전했다. 그래, 김치가 없었다. 감자탕에 김치 한 조각 곁들이지 않는다면 그건 반쪽짜리 식사나 다름없다.


"김치가 없네. 내가 묵은지 꺼내올게."


내 말에 아이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평소에는 무심한 척하던 아이들의 귀가 쫑긋 세워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김치 냉장고 깊숙한 곳에서 오래도록 숙성된 묵은지 통을 꺼내왔다. 김치통의 뚜껑을 여는 순간, 그 특유의 향이 주방 가득 퍼져나갔다.


둘째가 제일 먼저 반응했다. 그 아이는 평소에도 눈치가 빨랐지만, 오늘은 특히 더 빨랐다. 마치 화생방 훈련을 받은 군인처럼 재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오빠, 빨리 창문 열어!"


그 말과 동시에 첫째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렇게 빠른 의사소통과 행동은 평소에는 보기 힘든 광경이다. 학교 숙제나 집안일에 대해 물어보면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곤 하던 아이들이, 묵은지 김치통 앞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척척 맞는 호흡을 보여주었다.


딸아이는 잎베란다로, 아들은 뒷베란다로 재빠르게 피신했다. 그들은 마치 오랜 시간 연습해 온 대피 훈련을 완벽하게 수행하는 것 같았다. 창문을 열고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는 아이들의 모습이 마치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여행자 같았다.


"니들이 자주 먹는 김치찜 재료가 이거야!"


내가 외치는 소리는 아이들의 귀에 들리지 않는 듯했다. 마치 소리를 차단하는 특수 장비라도 갖추고 있는 것처럼 내 말은 베란다와 주방 사이의 어딘가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들은 창가에 서서 마치 오염된 지역을 바라보는 과학자들처럼 주방을 응시했다.


묵은지 김치를 접시에 담아 식탁에 놓았다. 그 깊고 진한 향, 오랜 시간 숙성되어 더욱 깊어진 맛의 절정을 나 혼자 만끽했다. 재미있는 것은 내가 먹을 때는 그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니, 정확히는 냄새라기보다는 향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깊고 풍부한 발효의 향이 감자탕과 어우러져 최고의 조화를 이루었다.


김치통을 닫아 김치 냉장고로 옮기고 나니 아이들이 조심스럽게 주방으로 돌아왔다. 마치 외계 생명체를 조사하는 우주인처럼 코를 킁킁거리며 공기의 상태를 확인했다.


"아직도 냄새 나?"

"조금..."


아이들의 표정이 말해주었다. 그들에게는 여전히 김치 냄새가 남아있는 것 같았다.


재미있는 것은 평소에 아이들은 서로 티격태격 다투기 일쑤다. "내 방에 들어오지 마!", "내 물건 만지지 마!" 하루에도 몇 번씩 이런 소리가 오가며,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심지어 내가 중재자로 나서도 전혀 효과가 없을 때가 많다.


하지만 묵은지 김치통이 등장하는 순간만큼은 완벽한 의사소통과 협력이 이루어진다. 어떤 말도 필요 없이 눈빛만으로 서로의 의도를 파악하고, 각자의 피난처로 재빠르게 움직인다. 묵은지 김치통은 우리 집 남매를 하나로 뭉치게 하는 특별한 매개체인 셈이다. 물론 그것이 '피하기 위한' 결속이긴 하지만 말이다.


가끔은 이런 소소한 일상 속에서 웃음을 찾게 된다. 김치 냄새를 피해 베란다로 달려가는 아이들, 그러면서도 김치 냄새는 질색팔색 하지만, 김치찜은 맛있게 먹는 모순적인 남매의 모습. 평소에는 서로 싸우다가도 이런 순간에만 한마음 한뜻이 되는 우리 집 남매를 보면 참 재미있다. 아이들이 서로 싸우면 다음에는 묵은지부터 꺼내야 싸움이 멈추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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