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멸의 시대, 존재의 증명

AI가 대체할 수 없는 인간의 '의지'와 '고민'에 대하여

by 일상예술가 정해인

친구와 AI 이야기를 했다. 처음엔 가벼웠다. 요즘은 뭐가 뜨냐, 어떤 툴이 좋냐, 어디까지 갈 것 같냐. 그런데 이런 대화는 늘 끝이 비슷하다. 우리는 결국 먼 미래로 간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같은 질문을 품고 돌아온다. 앞으로 나는 무엇으로 살아남을까.


인류는 늘 도구와 함께 살아왔다. 도구는 인간의 부족함을 메워줬다. 망치는 손을 대신했고 자동차는 다리를 늘려줬다. 기계는 인간의 근력을 대신해 주었고, 우리는 그 덕분에 더 멀리, 더 오래,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 파도는 결이 다르다. AI는 힘이 아니라 생각을 건드린다. 예전에는 인간의 고유 영역이라고 믿었던 지성과 판단력에까지 손을 뻗는다. 어느 순간부터 ‘기계가 일을 돕는다’가 아니라 ‘기계가 일을 한다’가 되었다.


친구가 말했다. 기계 의사의 수준이 숙련된 의사를 따라잡는 데 4년이면 충분하다는 예측이 있다고. 그 말을 들으며 나는 잠깐 말이 없어졌다. 충격이라는 말로는 부족했다. 그건 경고에 가깝다. 대학병원에 수백 명의 의료진이 있는 풍경이 사라질 수도 있다. 언젠가 그 자리엔 열 명 남짓의 의사만 남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머지는 기계가 대신한다. 의사라는 직업 하나가 흔들리는 게 아니다. 우리가 믿어왔던 전문직이라는 개념 자체가 붕괴하는 장면이다. 그 순간부터 질문은 '어떤 직업이 안전한가?'가 아니라, '어떤 인간이 살아남는가?'로 바뀌어야 한다.


그럼 어떤 직업이 살아남을까? 솔직히 말하면 답은 없다. 대부분의 정형화된 업무는 자동화될 것이다. 데이터를 기반으로 판단하는 일, 반복되는 업무, 규칙과 절차로 움직이는 일은 기계가 인간보다 훨씬 잘한다. 속도도 정확도도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나는 ‘틈새’는 남을 거라고 생각한다. 기계가 못해서가 아니라, 인간이 원해서 남는 영역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기계를 불편해한다. 노령층이 그렇다. 기계를 싫어해서가 아니라 낯설어서다. 버튼 하나만 잘못 눌러도 모든 게 무너질 것 같고, 그 불안이 사람을 다시 사람에게로 가게 만든다. 결국 그들에게는 정답보다 위로가 필요하고, 해결보다 체온이 필요하다.


기술이 닿지 못하는 곳도 있다. 아프리카처럼 기술의 혜택이 충분히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는 기계를 개발하는 것보다 기계를 공급하고 유지하는 일이 더 어렵다. 그런 곳엔 ‘효율’보다 ‘책임’이 먼저다. 속도보다 윤리가 앞선다. 그래서 그런 분야에서 사람의 일이 살아남을 가능성이 크다. 결국 마지막에 남는 건 기계가 못하는 일이 아니라, 기계가 해도 인간이 원하지 않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다 우리는 또 다른 쪽으로 이야기가 흘렀다. 일자리가 사라진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일자리가 사라진다는 말은 공포로 들린다. 하지만 다른 시선으로 보면 새로운 생존 방식으로 넘어가는 과정일 수도 있다. 나는 기본소득이라는 구조로 갈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모든 직업이 사라지고 인간이 ‘생산의 주체’가 아니라 ‘존재 자체’로 남게 될 때, 기본소득은 인간다운 삶을 유지하게 하는 최소한의 장치가 될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건 그다음이다. 모두가 똑같이 받는 돈 위에서 인생은 갈린다. 아주 작은 플러스알파, +α가 얹히는 순간 삶은 달라진다. 그 차이는 크지 않다. 한 끗이다. 그런데 그 한 끗이 인생 전체를 바꾼다. 그 플러스알파는 재능일 수도 있고 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결국 마지막은 의지라고 생각한다. 하고, 또 하려는 의지. 결국 그게 남는다.


AI는 답을 준다. 너무 빠르고 너무 정확하게. 그런데 답이 많아질수록 질문이 사라진다. 그래서 더 무서운 건 AI가 아니라, 질문을 하지 않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왜 사는가. 무엇을 위해 사는가. 이 질문은 기계가 대신할 수 없다. 이기적인 인간은 나쁜가. 이타적인 인간은 선한가. 이런 윤리적 고민은 더더욱 그렇다. 정답이 없기 때문에, 인간이 스스로 내려야 한다. 그래서 결국 남는 건 질문이다. 답이 아니라 질문.


이런 질문을 깊이 하게 되는 시기가 있다. 대부분 청소년기다. 그때는 괜히 예민해지고, 별것도 아닌 일에 흔들리고,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느끼고, 때로는 삶이 의미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시간은 단순히 괴로운 시간이 아니라 사람을 만드는 시간이다. 그 시절의 치열한 사유를 거친 사람의 인생은 풍요로워진다. 반대로 그 시간을 그냥 지나친 사람은 인생이 매끈해 보이지만 어딘가 비어 있다.


나도 사실 특별한 고민이 없었다. 그저 주어진 대로 살았다. 맡은 일에 충실했고, 그게 좋은 삶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다르다. 과거의 내가 이런 일을 하게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우리는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 산업혁명 시절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항상 엉뚱한 미래를 상상했다. 어떤 시대에는 잠수함이 고래를 끌 것이라고 믿기도 했다. 지금도 우리는 그 비슷한 방식으로 미래를 상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만 하나는 분명하다. 어떤 미래가 오든, 결국 살아남는 사람은 가장 똑똑한 사람이 아닐 수 있다. 가장 빠른 사람도 아닐 수 있다. 끝까지 질문하는 사람이다. 끝까지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다. 기계가 답을 주는 시대에 인간은 질문으로 살아남는다. 그리고 그 질문의 끝에는 결국 하나만 남는다.


소멸의 시대에 우리가 증명해야 하는 건 직업이 아니라,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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