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뢰

제1화

by 일상예술가 정해인

전화를 받기 직전, 나는 문자 하나를 지우고 있었다.


보낸 사람은 인천청 후배 이현호였다. 지금은 조사2국 팀장이다. 퇴직하고 나서도 가끔 연락이 왔다. 밥 한번 먹자, 요즘 어떻게 지내냐. 선한 말들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문자들을 읽고 나서 항상 잠깐 멈췄다.


이 사람이 왜 연락하는지 나는 안다. 물론 나쁜 의도가 있는 게 아니다. 그냥 지켜보는 것이다. 박 세무사가 조직을 나가서 뭘 하는지. 혹시 선 넘는 일을 하는 건 아닌지. 의식적인 감시가 아니라, 조직에 오래 있은 사람의 본능 같은 것이다. 나도 그 본능을 안다. 나도 그랬으니까.


문자를 지웠다.

오후 11시 14분. 그때 전화가 왔다. 발신자 표시 없음.


전화는 항상 밤에 온다.

23년간 국세청에 있으면서 배운 것이 있다면 그것이다. 낮에 전화하는 사람은 상담을 원하고, 밤에 전화하는 사람은 탈출을 원한다. 낮의 목소리는 또렷하고 질문이 구체적이다. 얼마를 내야 하냐, 어떻게 줄일 수 있냐, 합법적인 방법이 있냐. 그런데 밤의 목소리는 다르다. 낮아지고, 느려지고, 말과 말 사이에 공백이 생긴다. 그 공백 안에 진짜 질문이 들어 있다.


'어떻게 탈출할 수 있나요?'


세 번째 벨이 울릴 때 받았다. 첫 번째에 받으면 기다렸다는 티가 나고, 다섯 번째까지 기다리면 상대가 끊는다. 이 일을 하면서 생긴 습관이다.


"박 세무사님이시죠?"


목소리는 낮고 조심스러웠다. 50대 남자. 서울 말씨인데 어딘가 힘을 빼려고 애쓰는 티가 났다. 원래 목소리보다 한 톤 낮게 깔고 있는 사람 특유의 느낌이었다. 긴장했거나, 혹은 도청을 의식하거나. 이 바닥에서 둘 다 흔한 이유다.


"그렇습니다."

"소개받고 연락드렸습니다. 직접 뵙고 싶은데요."


나는 창밖을 봤다. 여의도 불빛이 한강에 녹아 있었다. 63빌딩 꼭대기에 불이 켜져 있었고, 그 아래로 강물이 검게 흘렀다. 저 빌딩 건물주 중 몇 명이나 지금 이 시간에도 세금 걱정을 하고 있을까. 아마 대부분일 것이다. 돈이 많을수록 잠을 못 잔다. 국세청에 있을 때는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죄책감이려니 했다. 지금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걸 안다.


"어떤 건인가요?"

"재산을 해외로 이전하려 합니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나는 이 단어가 요즘 얼마나 자주 들리는지 안다. 작년보다 늘었고, 재작년보다는 두 배다. 언론은 이걸 '자본 도피'라고 부르고, 정치인들은 '반사회적 행위'라고 부른다. 국세청은 '역외탈세 혐의'라는 말을 쓴다. 나는 그냥 '의뢰'라고 부른다. 이름을 바꾼다고 본질이 바뀌지 않는다. 그리고 이름을 무섭게 만든다고 사람이 멈추지도 않는다. 오히려 더 정교하게 움직일 뿐이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만나서 말씀드려도 될까요?"


신중한 사람이다. 혹은 겁이 많거나. 이 바닥에서 둘은 구별이 안 된다.


"내일 오전 10시. 마포구 합정동에 사무실이 있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서 나는 한참 앉아 있었다.

국세청 조사국에 있을 때, 나는 이런 사람들을 잡는 쪽이었다. 서류 뒤에 숨긴 돈을 찾아내고, 페이퍼컴퍼니를 추적하고, 공항 출국장에서 출국 금지 통보를 받게 만드는 쪽. 23년 동안 나는 그게 옳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잘 모르겠다.


내가 잡던 사람들이 왜 도망치려 했는지, 그땐 묻지 않았다.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법을 어겼으면 잡는 것이고, 잡히면 내는 것이고, 그게 끝이었다. 그 사람이 왜 숨겼는지, 얼마나 억울한지, 잡히고 나서 어떻게 됐는지. 그런 건 내 소관이 아니었다.

지금은 그게 가장 먼저 궁금했다.


처음 이 일을 시작했을 때 나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법 테두리 안에서만 움직이자고.

그 말은 지금도 유효하다. 나는 불법을 돕지 않는다. 서류를 위조하지 않고, 계좌를 숨기지 않고, 거짓 신고를 권하지 않는다. 내가 하는 일은 절세다. 합법적인 방법으로 세금을 줄이는 것. 세무사라면 누구나 하는 일이다.


다만 회색지대라는 게 있다.


과세의 블랙도 아니고, 비과세의 화이트도 아닌 그레이. 과세인지 비과세인지 법원도 헷갈리는 영역. 국세청은 그걸 과세라고 보고, 납세자는 비과세라고 보고, 판사는 사건마다 다르게 판단하는 곳. 나는 그 회색지대를 누구보다 잘 안다. 23년 동안 그 지대의 경계를 그어온 사람이었으니까.


지금 나는 정확하게 그 경계의 반대편에 서 있다.


처음 의뢰를 받고 나서 며칠 동안 잠을 잘 못 잤다. 범죄 조력자가 되는 기분이었다. 실제로 범죄는 아니었다. 하지만 기분은 그랬다. 내가 아는 회색지대를 이용해서 세금을 줄이는 것. 한 끝 차이로 그게 탈세가 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탈세가 되는 순간, 납세자만 문제가 되는 게 아니라는 것.


나까지도 문제가 될 수 있었다.


그 생각이 밤마다 찾아왔다. 지금도 계속 찾아온다. 그런 느낌은 사라지지 않는다. 어쩌면 사라지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 불편함이 있어야 내가 선을 지킨다. 불편하지 않아지는 순간이 더 위험하다.


창밖 한강은 여전히 검었다. 나는 문자를 작성했다. 건물 이름과 주소. 보내기 버튼을 누르고 나서 잠시 화면을 봤다.


내일 이 사람이 올 것이다. 그리고 나는 들을 것이다. 그가 왜 떠나려는지 알게 되겠지.

그 이유가 내가 생각하는 것과 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나는 아마 돕게 될 것이다.

그게 옳은 일인지는 아직 모르겠다.

다만 더 이상 잡는 일은 못하겠다는 것만은 안다.

이전 01화프롤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