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뢰인

제2화

by 일상예술가 정해인

합정동 사무실은 크지 않다.


책상 하나, 의자 둘, 그리고 벽면을 채운 세법책들. 국세청 공무원증을 반납하던 날 챙겨 온 것들이다. 동료들은 왜 저걸 가져가냐고 했다. 퇴직하면 필요도 없는 거 아니냐고. 나는 그냥 웃었다. 설명하기 귀찮았다. 사실은 이것들이 없으면 내가 뭘 하던 사람인지 잊을 것 같았다. 좋은 의미에서가 아니라, 나쁜 의미에서도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 사무실이 있는 건물은 4층인데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그런 외진 곳의 4층 사무실을 잡았다. 일부러 그렇게 골랐다. 사람들이 찾아오기 불편한 곳에 사무실을 두면 진짜 필요한 사람만 온다. 급한 척하는 사람, 호기심에 오는 사람, 남의 일 염탐하러 오는 사람은 계단 네 층을 올라오지 않는다. 계단을 다 올라와서 노크하는 사람은 적어도 진심이다.


10시 정각에 노크 소리가 났다.


시간을 지키는 사람이다. 일찍 오지도, 늦지도 않았다. 이것도 하나의 정보다. 일찍 오는 사람은 불안하고, 늦게 오는 사람은 우위를 점하려 한다. 정각에 오는 사람은 통제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흐트러지는 게 싫은 사람.


"들어오십시오."


문이 열렸다.


부자는 특별하게 생기지 않았다.

23년 동안 수백 명을 만났다. 수십억부터 수천억을 가진 사람들까지. 처음 이 일을 시작했을 때는 나도 부자에 대해 어떤 선입견이 있었다. 명품을 두르고, 거드름을 피우고, 자신이 특별한 사람이라는 걸 드러내는 사람들일 거라고. 그래야 내 일이 쉬웠다. 나쁜 사람을 잡는 거니까. 나쁘게 생긴 사람을 잡는 게 훨씬 편하니까.


그런데 실제로 만난 사람들은 달랐다.

그냥 이웃집 아저씨 같았다. 피곤해 보이고, 걱정이 많고, 가족 얘기를 꺼내고, 커피를 두 손으로 감싸 쥐는 사람들. 명품 시계를 차고 오는 사람보다 낡은 구두를 신고 오는 사람이 더 많았다. 오래된 걸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 익숙한 것에 기대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람들 앞에 앉아서 서류를 펼치면 이상한 감각이 들었다.

사치를 하고, 뻔뻔하고, 처벌받아야 마땅한 사람이라면 힘을 낼 수 있었을 것이다. 나쁜 사람을 잡는다는 확신이 생기니까. 하지만 내 앞에 있는 사람은 나와 똑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이었다. 자식 걱정, 건강 걱정, 노후 걱정. 나보다 돈이 많을 뿐, 걱정의 종류는 같았다.


그리고 가끔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은 남들보다 열 배, 백 배의 세금을 낸다. 그 돈으로 도로가 깔리고, 학교가 세워지고, 복지관이 돌아간다. 그런데 왜 존경이 아니라 비난을 받는가. 왜 더 내는 사람이 더 욕을 먹는 걸까?


물론 탈세는 잘못이다. 그건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탈세를 하는 사람과 세금을 피하고 싶은 사람은 다르다. 피하고 싶다는 마음은 인간의 본능이다. 나도 그 마음을 안다. 나 역시 월급에서 세금이 빠져나갈 때마다 조금씩 아팠으니까. 그 아픔이 백 배인 사람이 빠져나갈 구멍을 찾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들어온 사람은 예상보다 평범했다.

짙은 감색 재킷, 넥타이를 매지 않은 흰 셔츠를 입고 있었다. 60에 가까워 보이는데 머리는 단정하게 넘겼다. 키는 평균보다 조금 크고, 체형은 마른 편이었다. 젊었을 때 꽤 날렵했을 것 같은 인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깨가 아주 조금, 알아채기 어려울 만큼 조금 안으로 굽어 있었다. 오래 짊어진 것들이 있는 사람의 자세다.


그가 신은 구두는 오래됐지만 잘 관리된 것이었다. 오래 신은 구두를 계속 고쳐 신는 사람. 새것을 사는 게 아까운 게 아니라, 익숙한 것을 버리는 게 싫은 사람이었다.


부자처럼 보이려고 애쓰지 않는 부자의 인상이랄까. 오히려 그게 더 많은 걸 말해줬다.


"강민준입니다."


명함을 내밀지 않았다. 나도 요구하지 않았다. 이 자리에서 명함은 필요 없다. 명함에 적힌 직함과 회사명은 지금 이 대화와 아무 상관이 없으니까.


"앉으시죠."


그는 의자에 앉으면서 잠깐 내 사무실을 둘러봤다. 시선이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천장, 창문, 책상, 그리고 벽. 벽의 세법책들 뭉치에서 멈췄다. 잠깐 읽는 척했지만 실은 제목을 확인하는 게 아니었다.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가늠하고 있었다.


"조사국 출신이시라고 들었습니다."


"서울지방국세청 조사 4국에 있었습니다. 2000년부터 23년간 국세청에서 일했죠."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끄덕임 안에 복잡한 감정이 섞여 있었다. 안도인지, 불안인지, 아니면 그 둘이 뒤엉킨 건지. 조사관 출신이라는 말이 그에게 두 가지 뜻으로 들렸을 것이다. 내부를 안다는 안도. 그리고 — 저 사람이 언제든 나를 다시 그쪽에 넘길 수 있다는 불안.


나는 둘 다 맞다고 생각한다.


"싱가포르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단도직입이었다. 나는 수첩을 펼쳤다.


"자산 규모가 어떻게 되십니까?"


"부동산 포함해서 380억 정도 됩니다."


"법인은요?"


"제조업 두 개를 운영 중입니다. 하나는 아들 명의로 넘겼고, 하나는 아직 제 이름입니다."


나는 받아 적으면서 한 가지를 계산했다.


"언제 넘기셨습니까."


"재작년 초입니다."


펜을 멈추지 않았다. 표정도 바꾸지 않았다. 하지만 머릿속에서 숫자가 맞춰졌다. 재작년 초에 법인을 넘겼고, 작년에 두 번째 세무조사를 받았다.


"조사 통보가 언제 왔습니까?"


강민준이 잠깐 나를 봤다.


"작년 봄이었습니다."


법인 이전이 조사의 트리거였다. 사업을 넘기며 증여세도 냈을 것이다. 절세의 범위 안에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타이밍은 말해준다. 이 사람은 조사가 올 것을 알고 있었다. 혹은 예상했다. 그리고 움직였다.


나는 계속 받아 적었다.


이 사람이 완전히 결백하냐고 묻는다면, 나는 모른다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그게 지금 중요한 질문인지도 모르겠다. 완전히 결백한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문제는 그 결백하지 않음의 크기와 방향이다.

강민준의 것은 작고, 방어적이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왜 지금 가시려고 하세요?"


그가 처음으로 말을 멈췄다.


창밖에서 버스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합정동 큰길 쪽이었다. 그 소리가 지나가고 나서 사무실이 다시 조용해졌다. 그는 그 침묵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작년에 세무조사를 받았습니다. 두 번째였어요. 특별한 혐의가 있었던 게 아닙니다. 그냥... 저 같은 사람 한 명 잡으면 뉴스가 되니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부정하지도, 동의하지도 않았다. 그가 틀린 말을 한 게 아니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다음 조사가 언제 올지 모르는 채로 사는 게 지쳤습니다. 범죄자도 아닌데, 내가 번 돈인데, 왜 항상 내가 증명해야 합니까. 왜 항상 내가 먼저 의심받고, 내가 아니라는 걸 내가 입증해야 합니까?"


목소리가 처음으로 조금 올라갔다. 그리고 스스로 눌렀다. 오래 눌러온 사람의 방식으로.


"제 직원이 150명입니다. 20년 동안 한 명도 안 잘랐어요. 세금도 제대로 냈고. 세무조사 나올 때마다 장부 다 열었습니다. 숨긴 거 없어요. 근데 사람들은 저 같은 사람을 욕합니다. 뉴스에 나오면 댓글이 달립니다. 잘 됐다고. 더 털어야 한다고."


그는 잠깐 멈췄다.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어요. 진짜로."


나는 그 말을 받아 적지 않았다. 수첩에 적을 수 있는 종류의 말이 아니었다.

강민준이 돌아간 뒤 나는 한참 앉아 있었다. 그가 남기고 간 메모 한 장이 책상 위에 있었다. 연락처와 함께 적힌 단어 하나.


싱가포르


나는 그 글씨를 오래 봤다. 반듯한 필체였다. 급하게 쓴 글씨가 아니었다.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써두었던 글씨 같았다.


이 사람이 완전히 선한 사람인지는 모른다. 완전히 억울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쳤다는 건 안다. 그리고 지친 사람은 반드시 떠난다.


내가 돕든 안 돕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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