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골수

제3화

by 일상예술가 정해인

싱가포르


나는 그 글씨를 한참 봤다. 창밖은 어느새 어두워지고 있었다. 합정동 골목에 가로등이 하나씩 켜졌다. 나는 메모를 뒤집어 놓았다. 보이지 않아도 거기 있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뒤집어 두는 게 나았다.


강민준이 한 말이 머릿속에서 계속 돌았다.


'범죄자도 아닌데, 내가 번 돈인데, 왜 항상 내가 증명해야 합니까?'


나는 이 말을 처음 듣는 게 아니었다. 조사관으로 일하면서 수십 번 들었다. 그때는 흘려들었다. 잡힌 사람이 하는 말이려니 했다. 억울한 척하는 거려니 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게 들린다. 그 말을 하던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씩 떠오른다. 그리고 그중 몇 명은 정말로 억울했다는 걸, 지금의 나는 안다.


2009년 겨울이었다.


서울청 조사4국 회의실은 항상 형광등이 하나 깜빡거렸다. 교체 신청을 몇 번 했는데 예산이 없다는 말만 돌아왔다. 그 깜빡임에 익숙해질 즈음, 나는 이미 그 방에서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바깥은 눈이 내리고 있었다. 조사반장인 나를 포함해 네 명이 테이블에 앉았다. 조사팀장, 조사과장, 그리고 조사4국장까지. 회의가 시작되기 전에 아무도 말이 없었다. 시작부터 이상했다. 보통은 날씨 얘기라도하는데 유난히 달랐다.


안건은 하나였다. 제조업 회장 K에 대한 소득세 과세 여부.


K 회장은 인천에서 30년 가까이 사업을 한 사람이었다. 자동차 부품 제조업으로 시작해서 지금은 계열사가 네 개였다. 지역에서 꽤 알려진 사람이었다. 직원만 수백 명이었고, 지역 경제와 얽힌 실이 많았다.


나는 서류를 세 번이나 읽었다. 읽을수록 확신이 강해졌다.


"이건 과세 요건이 안 됩니다."


조사팀장이 나를 봤다. 표정이 없었다. 그 무표정이 더 불편했다.


"박 반장, 다시 검토해봐요."


"여러 번 했습니다. 논리적으로 맞지 않아요. 소득의 실질 귀속이 불분명하고, 이걸 개인 소득으로 보기엔 근거가 너무 약합니다."


조사과장이 볼펜을 돌리면서 말했다.


"내부 법률 검토에서 과세 가능으로 나왔잖아요."


"검토 의견이 과세 가능이라고 해서 과세가 옳다는 뜻은 아닙니다. 가능하다는 거랑 맞다는 건 다릅니다."


잠깐 침묵이 흘렀다. 형광등이 한 번 깜빡였다.

조사과장이 조용히 말했다.


"위에서 이미 방향이 잡혔어."


나는 그 말을 듣고 잠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위에서 방향이 잡혔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사람은 이 방에 없었다.


"어떤 이유에서 방향이 잡혔습니까?"


내가 물었다. 물으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 물었다.

조사팀장이 나를 봤다. 이번엔 무표정이 아니었다. 조금 피곤하다는 표정이었다. 이 대화가 예상됐다는 표정이었다.


"박 반장, 여기가 어딘지는 알지?"


"조사4국입니다."


"그래. 4국이야."


그게 무슨 뜻인지 나는 알았다. 조사4국은 달랐다. 다른 조사국보다 앞서 과세해야 하는 곳이었다. 과세 가능성이 높을 때만 과세하는 게 아니라, 시범케이스를 만드는 곳이었다. 4국이 먼저 치면 다른 조사국이 따라온다. 그게 국세청 전체의 방향을 만든다.


조사 과장이 말을 받았다.


"우리가 길을 내야 다른 데도 움직여. 4국이 안 하면 아무도 안 해."


나는 잠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말인지는 알았다. 논리도 이해했다. 국세청이 새로운 과세 영역을 개척하려면 누군가 먼저 해야 한다. 판례가 없는 곳에 먼저 들어가는 것. 그게 4국의 역할이라는 것.


하지만 납득할 수가 없었다.


그 시범케이스의 대상이 그 사람이라는 게. 300억짜리 시범케이스. 질 수도 있는 싸움을 일단 걸어보는 것. 애들 장난도 아니고, 가능성을 따지기 전에 일단 과세를 하자는 것.


"그 사람이 지면 어떻게 됩니까."


내가 물었다.


"소송하겠지."


"소송에서 우리가 지면요."


4국장이 처음으로 나를 똑바로 봤다. 회의 내내 서류를 보는 척했는데, 사실 한 장도 넘기지 않았다.


"그러면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되지."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된다.

300억을 맞은 사람은 그때까지 버텨야 한다. 소송비를 써야 한다. 회사를 끌고 가야 한다. 그 시간 동안 겪는 것들은 누가 책임지는가. 우리가 이기면 시범케이스가 되고, 우리가 지면 그냥 없던 일이 된다. 그 사이에 낀 사람은 그냥 운이 나빴던 것이다.


국장이 천천히 말했다.


"박 반장 의견은 기록해두겠습니다. 근데 결론은 과세로 갑니다."


그게 끝이었다.

네 명 중 세 명이 과세를 원했다. 아니, 정확히는 — 세 명이 과세를 해야 했다. 나쁜 사람들이 아니었다. 다들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국세청을 위한다고 믿는 사람들이었다.

그게 더 무서웠다.


나쁜 의도 없이도 이런 결정이 나올 수 있다는 것. 형광등이 또 한 번 깜빡였다.


소득세 300억.

K 회장은 통보를 받고 처음엔 조용했다. 일주일 뒤에 이의신청을 냈다.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리고 3개월 뒤에 소송을 걸었다.

1년 후 국가가 졌다.


나는 그 판결문을 혼자 읽었다. 퇴근하고 집에 와서, 아무도 없는 거실에서. 법원은 내가 회의실에서 말했던 것과 거의 같은 논리로 썼다. 소득의 실질 귀속이 불분명하다. 개인 소득으로 볼 근거가 부족하다. 과세는 부당하다.


나는 판결문을 읽으면서 이상하게 후련하지 않았다. 내가 옳았다는 게 증명됐는데, 그게 아무 의미가 없었다. K 회장이 소송비로 쓴 돈이 10억이 넘었다고 나중에 들었다. 이긴 소송에서 10억을 쓴 것이다. 그는 국가에 손해배상 청구를 하겠다고 했지만 회계팀장과 법무팀장이 극구 말렸다. 말리는 이유는 하나였다.


"그러다가 국세청 타겟 됩니다."


이긴 사람이 보복이 무서워서 입을 닫는 나라.

나는 그 말을 전해 들으면서 오래 앉아 있었다. 과세 통보가 나간 직후였다. K 회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처음엔 정중했다. 목소리를 낮추고, 말을 골라가며 물었다.


"반장님, 이거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나는 전화를 받으면서 창밖을 봤다. 청사 앞 주차장이었다. 직원들이 차를 빼고 있었다. 퇴근 시간이었다.


"저도 회장님 말씀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전화기 너머 침묵이 흘렀다. 길었다. 그가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었을 것이다.


"그럼 왜.."


"저는 조직에 있습니다."


내가 말을 잘랐다. 부드럽게, 하지만 분명하게.


"조직의 논리는 상명하복이 기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불이익이 생깁니다. 그리고 이 건은 처음부터 과세 방향으로 분석이 내려왔고, 내부 법률 검토 의견도 과세로 나왔습니다."


"반장님 의견은 달랐잖아요."


그가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른다. 아마 어딘가에서 흘러나왔을 것이다. 이런 건 항상 흘러나온다.


"저 혼자 과세 불가를 주장하다가는, 오히려 납세자로부터 편의를 받은 거 아니냐는 오해를 삽니다. 제가 회장님 편을 든다고 보이면 저도 내부 감찰 대상이 됩니다."


말하면서 나는 스스로 듣고 있었다. 이 말이 얼마나 비겁하게 들리는지. 틀린 말이 아닌데, 그래서 더 비겁했다.


"회장님, 저도 이해합니다. 하지만 내부 상황상 달리 방법이 없었습니다."


K 회장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그리고 전화를 끊었다.


화를 내지 않았다. 욕도 하지 않았다. 그냥 끊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이. 아니, 어쩌면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 전화로 뭔가 바뀌지 않는다는 걸. 그래도 물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냥, 한 번은.


나는 그날 퇴근하면서 그 침묵을 되씹었다.


조직이란 논리는 상명하복.


내가 K 회장에게 한 말인지, 나 자신에게 한 말인지 구분이 안 됐다. 아마 둘 다였을 것이다. 그리고 둘 다에게 충분하지 않은 말이었다.


나는 책상에서 뒤집어둔 메모를 다시 뒤집었다.


싱가포르


K 회장은 결국 떠나지 않았다. 소송에서 이겼고, 입을 닫았고, 그냥 살았다. 하지만 강민준은 다를 것 같았다. 그 눈빛이 달랐다.

K 회장은 아직 이 땅에 미련이 있는 사람의 눈빛이었다.

강민준은 이미 마음이 떠난 사람의 눈빛이었다.


마음이 먼저 떠난 사람은 반드시 몸도 떠난다.


내가 돕든 안 돕든.

이전 03화의뢰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