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승사자

제5화

by 일상예술가 정해인

사직서를 쓴 날은 목요일이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날이 아니었다. 월요일에 쓰면 한 주를 버티다 충동적으로 쓴 것 같고, 금요일에 쓰면 주말 내내 후회할 것 같았다. 그냥 목요일이었다. A4 용지 한 장에 몇 줄 적었다. 일신상의 사유로 사직하고자 합니다. 그게 전부였다. 23년을 몇 줄로 정리하는 게 맞는 건지 모르겠었지만, 더 길게 쓸 말도 없었다.


팀장에게 가져갔다.


그는 서류를 받아서 한 번 봤다. 그리고 나를 봤다.


"그 좋은 자리를 왜 박차고 나가."


명령도, 만류도 아니었다. 그냥 이해가 안 된다는 말이었다. 진심으로 이해가 안 되는 사람의 표정이었다. 이 사람에게 이 자리는 좋은 자리였다. 안정적이고, 권한이 있고, 노후가 보장되는 자리. 그게 맞다. 틀린 말이 아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그렇게만 말했다. 설명하지 않았다. 설명할 수 있는 말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설명해봤자 이해할 사람이 없었다. 이해받고 싶지 않기도 했다. 이해받으면 오히려 흔들릴 것 같았다.


과장은 복도에서 마주쳤다.


"자네 소문 들었어. 진짜야?"

"네. 맞습니다."

"왜?"

"그냥요."


그는 고개를 저었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그냥 다른 사람이었다. 이 조직 안에서 이 일이 옳다고 믿는 사람. 나도 한때는 그랬다.


아무도 퇴직을 응원하지 않았다. 아무도 조직의 방향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그게 서운하지 않았다. 오히려 편했다.


23년 동안 나는 칼을 휘둘렀다.


처음 발령받았을 때 선배가 말했다. 이 일은 기술이 아니라 담력이라고. 들어가서 흔들리지 않는 게 전부라고. 나는 그 말을 믿었다. 흔들리지 않으려고 했다. 처음 몇 년은 힘들었다. 조사 나가면 직원들이 나를 피했다. 납세자가 문 앞에서 기다렸다가 사정을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서류를 봤다. 사람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서류를 봤다.

그게 익숙해졌다.


익숙해지고 나서는 잘했다. 조사 실적은 항상 상위권이었다. 표창을 받았다. 승진도 했다. 국장이 악수를 청하면서 고생했다고 했다. 나는 감사합니다, 하고 웃었다.


그런데 칼을 휘두를 때마다 누군가가 다쳤다. 정확히는 돈이라는 피를 흘렸다.

처음엔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잘못한 사람이 다치는 거니까. 탈세한 사람이 벌을 받는 거니까. 그게 내 일이었다. 나는 법을 집행하는 사람이고, 법은 공평하게 적용되어야 하고, 그 과정에서 생기는 고통은 감수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상한 게 보이기 시작했다.


세금의 수혜자는 보이지 않았다.

내가 걷어낸 돈이 어디로 가는지, 누구에게 닿는지 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세금이 잘 쓰이고 있다는 증거를 나는 현장에서 한 번도 목격하지 못했다. 하지만 내 칼에 다친 사람은 항상 눈앞에 있었다. 공장 마당에서 담배 피우던 직원들. 전화기 너머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끊어버린 K 회장. 300억 과세 통보를 받고 창밖을 보던 그 눈빛.


나는 좋은 조사관이었다. 그게 문제였다.


열심히 할수록 누군가가 더 많이 다쳤다. 더 잘할수록 더 많은 사람이 무너졌다. 그리고 나는 그 사람들의 얼굴을 기억했다. 잊으려고 해도 기억이 됐다. 서류를 보면서 얼굴을 외면하려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서류 위에 얼굴이 겹쳐 보였다.


누군가는 나를 저승사자라고 불렀다.


조사 나간 어느 회사 직원이 복도에서 수군거리는 걸 들었다. 저승사자 왔다고. 농담 같았지만 농담이 아니었다. 저승사자는 맞았다. 나는 사람들에게 고지서를 들고 찾아갔다.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데려갔다.


저승사자는 열심히 할수록 좋은 저승사자가 된다.

나는 좋은 저승사자였다.


하지만 나는 저승사자가 되고 싶어서 이 일을 시작한 게 아니었다. 처음에는 달랐다. 세금이 공평하게 걷히면 더 많은 사람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고 믿었다. 탈세하는 사람을 잡으면 그 돈이 필요한 곳으로 간다고 믿었다. 그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버텼다. 흔들릴 때마다 그 믿음으로 돌아갔다.

그 믿음이 언제 사라졌는지는 모르겠다.


서서히 사라졌다. 한 번에 무너진 게 아니라, 사건이 쌓일 때마다 조금씩 줄어들었다. 300억 과세 건. 시화공단 공장 부도. 소송에서 이기고도 입을 닫아야 했던 K 회장. 그런 것들이 쌓이면서 어느 날 보니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사직서를 제출하고 건물을 나오던 날, 봄이었다.


4월 중순이었다. 여의도 벚꽃이 지고 있었다. 절정이 지난 꽃잎들이 바람에 날렸다. 길 위에 쌓여 있었다. 사람들이 그 위를 밟고 지나갔다. 꽃잎은 밟혀도 분홍빛이었다.


나는 한참 서 있었다.


23년을 다닌 건물이었다. 매일 들어오고 나갔던 건물인데, 마지막으로 나오는 날은 달랐다. 건물이 달라 보이는 게 아니었다. 내가 달라진 것이다. 이제 이 건물은 나를 기다리지 않는다. 내일 아침 이 문은 나 없이 열릴 것이다.


동료 하나가 나오다가 나를 봤다.


"퇴직하는 거야? 진짜로?"

"응."

"아깝다."


그 말이 선한 말이라는 걸 안다. 그런데 무엇이 아깝다는 건지, 나는 그 사람과 다른 걸 생각했을 것이다.

벚꽃이 한 움큼 날아왔다. 바람이 세졌다가 잦아들었다.


어떤 사람은 나를 지옥에서 배반한 저승사자라고 부를 것이다. 조직을 등졌으니까. 같은 편이어야 할 사람이 반대편으로 넘어갔으니까. 23년 동안 칼을 들었던 사람이 그 칼을 내려놓고 반대편에 섰으니까.

그래도 괜찮았다.


이제 나는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사람 곁에 있고 싶었다. 뒤에서 칼을 겨누는 게 아니라, 나란히 서서 앞을 보는 것. 세금이 무기가 아니라 약속이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 곁에.


사무실로 돌아왔다.


책상 위에 강민준의 메모가 있었다.


싱가포르.


나는 전화기를 집으려고 손을 뻗었다.

그때 전화가 먼저 울렸다.


화면을 봤다. 김재원. 역외탈세팀에서 같이 일했던 후배였다. 지금은 팀장이 됐다. 우리는 같이 사람들을 추적했다. 때로는 국세청이라는 조직도 숨기고 이름도 바꾼 채 활동했다. 이미 몰래 나간 사람들. 나가려고 준비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계좌 이동 패턴, 부동산 처분 순서, 출국 기록 등 그 흔적을 따라갔다.

나는 그 방법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계속 울리는 전화를 받았다.


"형님, 요즘 밖에서 일 많이 한다면서요."


웃는 목소리였다. 나도 웃으면서 들었다.


"그냥 세무 상담이지."


"살살 하세요. 그러다가 우리랑 척지면 어떻게 할려고요."


"걱정해줘서 고마워."


"형님한테 부탁이 하나 있는데요."


"말해봐."


"상담하다 보면 여러 사람 만나잖아요. 형님이랑 틀어지거나 경쟁자도 있을 거 아니에요. 그런 사람 정보 하나만 넘겨주시면, 우리가 직접 들어갈게요. 형님은 수수료도 받고, 경쟁자도 사라지고. 일석이조 아니에요?"


나는 잠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창밖에 가로등이 켜져 있었다. 합정동 골목이 조용했다. 책상 위 강민준의 메모가 보였다. 싱가포르. 반듯한 글씨.


"동생, 그거 부탁이야, 협박이야."


김재원은 웃었다.


"형님도 참. 무슨 협박이에요. 그냥 좋은 거 같이 하자는 거지. 근데 형님."

"응."

"조심하소. 조만간 내가 잡으러 갈 수도 있으니까."


전화가 끊겼다.

나는 한참 수화기를 내려다봤다.


사냥개였다가 표적이 된 느낌이 이런 것이었다. 내가 추적하던 방식으로 지금 누군가 나를 추적하고 있을 수 있다는 것. 내가 만나는 사람들이 기록되고 있을 수 있다는 것. 강민준을 돕는 순간, 나는 그 기록 안으로 완전히 들어가는 것이다.

나는 그걸 알았다.


그리고 전화기를 들었다.

벨이 두 번 울리고 그가 받았다.

"회장님, 박 세무사입니다."


잠깐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 안에 질문이 있었다. 나는 그 질문에 먼저 대답했다.


"도와드리겠습니다."


전화기 너머에서 긴 숨소리가 들렸다. 말이 아니었다. 오래 참았던 숨을 내쉬는 소리였다. 그 소리가 고맙다는 말보다 더 많은 것을 담고 있었다.


나는 수첩을 펼쳤다.

김재원이 잡으러 올 것이다. 언제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전에 내가 할 일이 있었다.


— 1부 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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