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잘하는 사람은 없다. 준비한 사람만 있을 뿐이다

대화를 미리 준비해 온 사람을 만난 날

by 일상예술가 정해인

[어떻게 말해야 사람을 얻는가?]을 읽고


어떤 사람과 헤어지고 나면 이유 없이 기분이 좋다.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비즈니스의 성패를 결정짓는 본질은 기술도, 역량도, 자본도 아니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 본질은 인간관계이고, 관계의 핵심은 대화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책을 읽을 때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오늘은 어떤 대화가 좋은 대화인지 체감할 수 있었다.


T — Topic, 대화에도 준비가 필요하다

미국계 투자자를 6개월 만에 만났다. 자리에 앉자마자 그가 먼저 물었다. "그때 진행하시던 딜은 어떻게 됐어요?" 6개월 전 이야기였다. 나는 잠깐 멈칫했다. 이 사람이 과거를 기억하고 있었구나. 별것 아닌 것 같지만, 그 한 마디가 대화의 온도를 바꿨다. 나는 그 순간 깨달았다. 오늘 이 대화가 잘 흘러갈 것 같다고.


대화는 즉흥처럼 보인다. 그런데 잘 흘러가는 대화는 대부분 누군가의 준비 위에 놓여 있다. 주제가 떨어지면 침묵이 온다. 침묵이 길어지면 대화는 식는다. 오늘 만날 사람이 요즘 어떤 일을 하는지, 지난번엔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그걸 미리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대화는 달라진다. 나도 오늘 물어볼 것들을 미리 생각했다. 그리고 그게 효과가 있었다. 만남을 위한 옷차림만 준비할 것이 아니라 대화의 주제도 미리 준비해 둘 필요가 있다.


A — Asking, 질문이 대화를 연다

그는 책상 위에 놓인 책을 봤다. 기다리는 동안 읽던 책이 눈에 들어온 모양이었다.

"무슨 책 읽고 계세요?"

"네 아니요"로 끝나는 질문이 아니었다. 그 질문 하나가 내 이야기를 끌어냈다. 나는 대화 공부를 하고 있다고 했고, 그는 더 자세히 물어, 나는 다른 주제로까지 이어 말했다. 어느새 나는 평소라면 꺼내지 않았을 이야기까지 하고 있었다.

책은 말한다. 질문을 많이 할수록 호감도가 올라간다고. 특히 열린 질문은 상대의 이야기를 끌어내고, 그 이야기 속에서 상대는 자신이 흥미로운 사람이라고 느낀다고. 질문은 또 주제를 자연스럽게 바꾸는 도구가 된다. 침묵이 흐를 때, 억지웃음이 나올 때 — 질문 하나가 대화를 다시 살린다. 대화를 주도하려 하지 않아도 된다. 잘 묻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L — Levity, 웃음과 칭찬이 마음을 연다

추위 이야기가 나왔다. 그가 추위를 많이 탄다고 했다.

"저도요. 영상인데 아직 내복 입고 있어요."

서로 웃었다. 코미디언의 농담이 아니었다. 작은 고백 하나, 솔직한 공통점 하나였는데 — 그걸로 충분했다.


책에는 웃음 전문가 프로바인의 연구가 나온다. 재미있는 사람의 정체는 따로 있지 않다고. 그냥 남보다 많이 웃는 사람이라고. 웃음은 전염되고, 많이 웃는 사람 곁에 있으면 자연히 같이 웃게 되고, 그러면 그 사람은 어느새 '재미있는 사람'이 된다고. 코미디언이 될 필요는 없다. 먼저 웃으면 된다. 웃음이 경계를 허물었다면, 칭찬은 마음을 열었다.

그는 내 글을 읽고 싶다고 했다. 대단한 말이 아니었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이상하게 그 말이 맴돌았다.


저자는 말한다. 칭찬은 가식적이라도 효과가 있다고. 외모 칭찬은 역효과를 부를 수 있지만, 상대의 안목이나 능력을 알아봐 주는 칭찬은 다르다. 그건 상대에게 당신은 그럴 만한 사람입니다라는 신호를 보내는 일이다. 웃음과 칭찬. 둘 다 거창하지 않다. 근데 둘 다 — 마음을 연다.


K — Kindness, 배려가 대화를 완성한다

그는 대화하는 내내 눈을 맞췄다. 내가 말할 때 끊지 않았다. 자기 이야기를 하면서도 내 반응을 살폈다. 대화가 끝날 즈음, 내가 전생에 '중국 상인의 딸'일지 모르겠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는 "그럴 수도 있겠다"라고 했다. 틀렸다 맞다를 따지지 않았다. 그냥 내 이야기를 받아줬다.


배려는 거창하지 않다. 눈을 맞추는 것, 끊지 않는 것, 받아주는 것 그게 전부다. 책은 이것을 마지막에 뒀다. 나는 처음엔 왜 마지막인지 몰랐다. 지금은 안다. Topic도, Asking도, Levity도 — 결국 상대를 향한 마음이 없으면 기술에 불과하다. Kindness는 나머지 셋을 살아있게 만드는 것이다.


사실 T, A, L, K는 순서가 아니다. 질문이 주제를 바꾸고, 가벼움이 깊은 질문을 가능하게 하고, 배려가 그 전부를 살아있게 만든다.


저자는 이것들이 상호보완적 관계라고 말한다. 따로따로 쓰는 기술이 아니라, 함께 맞물려 돌아가는 태도라고. 오늘 그 대화가 그랬다. 어느 하나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 전부가 자연스럽게 섞여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생각했다. 책을 읽고 머리로는 알았다. T, A, L, K. 근데 오늘 그 대화 속에서 그게 살아있는 걸 봤다. 기술이 아니라 태도로. 전략이 아니라 온도로. 말을 잘하는 사람은 따로 없었다. 그냥 — 나를 만나기 전에 나를 생각해 온 사람이 있었을 뿐이다.

다음 만남 전날 밤, 나는 그 사람을 떠올릴 준비가 되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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