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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상예술가 정해인 May 17. 2018

#7. 가끔은 일상도 그림이 된다

내 그림의 주제는 일상이다 

사람을 특별히 잘 그리는 것도 아니고

전문적으로 그림을 배운 것도 아니기에

그저 눈에 보이는 것들

마음이 많이 가는 것들을 그리게 된다 

아마도 커피집이었다 


상대방을 기다리는 사이 

로고를 그리고 있다 보니  

상대방이 와서 아는 척을 한다 


아무것도 없이 가만히 있을 때는

그렇게 가지 않던 시간이 

그림만 그리면 

화살처럼 빠르게 지나간다


덕분에 약속 시간에 늦은 상대방이 

멋쩍어할 시간도 없이 

그림 얘기로 분위기도 유쾌해진다

사실 공부를 하려고 책상에 앉았다

제일 아랫줄에 놓인 

세법학, 원가회계, 재무회계가 

얼른 공부하라는 목소리처럼 들린다

그래,

공부를 해야 하는데 

공부는 안 하고 그림만 그리고 있다 

공부 좀 해보겠다고 산 스톱워치

그런데 공부에는 그다지 써먹지 못했다 

그림 모델에 만족한다

사무실 근처에서 했던 이중섭의 그림전


담뱃종이에 그려진 그의 그림들

정말 찢어지게 가난해 

그림 그릴 종이도 없었던 중섭은

담뱃각에 들어있던 은박지에 

그림을 그렸다 


그 그림들을 모아놓은 그림전

어떤 종이가 되었든

어떤 그림이 되었든

그 그림에는 그 사람의 

진심이 묻어나게 된다 


내 그림에는 어떤 그림이 

묻어나게 되는지 

새삼 생각해보게 해주었다

그래서 전시장을 나오는 길에 

이중섭의 그림책을

하나 샀고 집에 와서 그려보았다

역시나 내 책상

한 장의 메모가 눈에 띈다 

공부를 좀 해보려고 붙였었는데 


'그만두는 건 버티는 것보다 

쉬운 결정이다

하는 데까지 해보고, 

더 이상 미련 없을 때 

뒤돌아 보지 않게 될 때,

포기하는 것이다'

-김성근


김성근 감독을 좋아라 하지는 않지만

그의 말은 일리가 있다 

포기는 그렇게 쉽게 하는 게 아니지

그런데 공부는 왜 그리 쉽게 포기되는지


전철로 퇴근해 저녁 약속 자리에 갔다

내가 제일 먼저 도착해 

식당에 있는 휴지통을 그려보았다


오는 길에 다른 사람들은 어떤 신발을 

신고 있나 그려 보았다 

얼굴이나 옷을 그려보고 싶었지만

초상권 문제도 있고 

잘 그릴 자신이 없어 신발을 그렸다 


'사람들이 참 저마다 다른 신발을

신고 다니는구나'하는 생각을 하며

재밌게 그렸던 기억이 난다 

사무실 전화기 

매일 같이 쓰던 전화기였는데 

막상 그리고 보니 새삼스럽다 

내 전화기가 이렇게 생겼었나? 


주위 동료가 주말에 

이 그림을 그렸더니 

사무실 생각이 너무 난다며

핀잔을 주었던 기억이 난다

40만 원이 넘는 시계


수백, 수천만 원짜리 시계가 넘쳐나서

명품이라 해야 할까? 


아무튼 예쁘게 잘 만들어진 

시계로 보여서 

사지는 않고 그림으로 그려 보고 

만족해했다 


꼭 그 물건을 가져야 

만족이 되는 건 아니니 말이다 

아이들과 함께 갔던 집 앞 놀이터

그 놀이터에 시계가 걸려 있어서 

아이들은 시계 놀이터에 가자고 했다 


아이들이 잠시 노는 동안 화단에 있던

식물을 그려보다 

생각보다 아이들이 금방 오는 바람에

얼마 그리지 못하고 멈추다 


어느 책인지 모르겠다 

아마 책 속에 유럽의 어느 풍경 그림이

있어서 나도 따라 그려보았다 


출장을 여러 곳에 가면서 느끼는 것이 

눈으로 보는 것에는 한계가 있고 

금방 잊힌다 


손으로 기억할 때 조금 더 기억에 

오래 남는다 

고생을 덜 해서 기억에 조금 남았던 걸까?

가족들과 함께 했던 전주 남문시장

남문시장의 간판들이 멋스러웠다 

개성 있는 글씨와 그림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그려보았다 

한 동안 육아서를 읽었었다

좋은 아빠가 되어보려고 


사실 좋은 아빠인지는 모르겠다 

혼은 내지 않으니까 좋은 아빠일까?


제목이 참 마음에 든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늘 그렇다 

아이들은 늘 미치게 한다 

특별히 의도를 가지고 

그런 건 아닌데 

아이들을 키우다 

제대로만 키우면 내가

성인군자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의 동화책 중에 

색감이 좋은 한 권이 눈에 보였다 

알록달록한 색감이 눈을 즐겁게 한다 


내가 그려왔던 것들을

되돌아보면

책, 주변 사물들, 식물처럼

늘 보게 되는 것들이다 


정말 평범한 것들이지만

그것을 내 나름대로의 

선으로 그림으로 그려내면

또 다른 추억이 된다 


거창한 것을 그리지 않더라도

평범한 일상이라도 

좋은 그림이 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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