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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상예술가 정해인 Oct 31. 2018

안경 쓴 빨강머리 앤

일곱 개의 날 그리고 일

우리 집에 있는 딸을 보면

빨강머리 앤이 생각난다

안경을 쓰고 있어서

난 '안경 쓴 빨강머리 앤'이라고 부른다


비록 머리가 빨간색은 아니지만

짧은 머리에서 느껴지는 강한 개성

높은 자존감

자유에 대한 갈망

마치 소설 속 빨강머리 앤을 본다는 느낌을 받는다

나는 딸을 보며 그녀의 미래를 상상해보게 된다


#예술이 시작되는 월요일

월요일 아침 출근길 지하철,

사람들의 표정에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창 밖을 바라보다 눈을 감는 서영이

들썩이는 어깨를 보니

신나는 음악에 맞춰 리듬을 타고 있다

스마트폰을 보다 목적지에 도착하니

지하철에서 우르르 내리는 사람들

서영이도 역시 다른 이들과 같이 내렸다

그녀의 얼굴에서는 다른 이들과 달리

알 수 없는 웃음이 보였다


가게 문을 밀고 들어가 모두에게 인사를 건넸다

“반가워요 즐거운 월요일이에요!”

며칠 전 들어온 신입 직원이

옆 직원에게 물어본다

“새로 오신 분인가 봐요?

지난주에는 안보이시던데?”

“네가 새로 들어와서 모르는구나

서영이는 월요일만 일해

다른 사람들과 달리 뭐랄까 4차원 같은 느낌이야”

신입직원은 서영이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랬다

서영이는 월요일만 미용실에서 일했다

그래서 디자이너 소개 칸에 올려져 있는 서영이 명함에는

“Only Monday”라고 크게 박혀 있었다

‘월요일만 쉬는 게 아니라 월요일만 일한다고?’

신입직원은 서영이를 이해할 수 없었다


옆 직원이 아리송해하는 신입 직원에게 한마디를 더 건넸다

“다른 날은 다른 일을 한데

춤을 춘다고 했던가

비행기를 탄다고 했던가?

아무튼 매일매일 하는 일이 다르데

그래서 어디 집중이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쩌면 그건 옆 직원의 질투였는지도 모른다

월요일 하루만 출근하지만 그녀의 스케줄은 빽빽했다

기계적인 컷이 아닌 개성을 살려주는 고유한 가위질에

전담 디자이너 서영이를 찾는 사람들이 몰렸다


오후 다섯 시 서영이에게 새로운 손님이 왔다

하지만 오늘 안에는 자를 수 없어 서영이는 양해를 구했다


“죄송해요 선생님

제가 오늘은 6시까지 정해진 손님이 계셔서 자를 수가 없네요

다음 주 월요일 시간 괜찮으세요?

선생님 사진을 찍어서

제가 괜찮은 스타일

두세 가지를 스케치해서

이메일로 보내드릴게요

그중에 마음에 드는 스타일로

다음 주 월요일에 자르시면 어떨까요?”


손님은 잠시 고민하더니

서영이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평범한 머리보다는 며칠 더 있더라도

새로운 스타일을 시도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신입직원은 서영이가 왜 일주일에 하루만 나와도

이 곳에서 버틸 수 있는 것인지 어렴풋이 이해가 되었다

 


#몸이 바쁜 화요일

어제 하루 종일 머리를 자르느라 서 있었다

다리가 많이 피곤했지만

오늘도 역시나 서영이에게는 힘든 하루다


최고의 요리사가 되기 위해

아직은 많이 부족해서

주방에서 보조 역할을 하고 있다


그녀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은

야채를 다듬고 메인 요리에 앞서

간단한 재료를 준비하는 보조 요리사이다


처음 식당에 취업했을 때

사장님이 물었다


"매일매일 나올 수 있나요?"

"죄송합니다 사장님

저는 화요일만 시간이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저희 식당에서는 좀 어려울 것 같은데요?"

"부탁드려요 저는 요리가 꼭 배우고 싶습니다

시급은 1/10만 주셔도 좋아요

제대로 된 이탈리안 요리를 꼭 만들어보고 싶거든요"

사장은 서영이의 어이없는 제안에 멍하니 있다가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에 써보기로 했다

"좋아요 일단 한 달만 일해보고 그다음에 더 생각해보기로 하죠!"


서영이는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

주방이라는 고달픈 공간에서

싫은 내색 없이 바삐 움직였다


요리기구 정돈부터

시키지 않은 일까지

메인 요리사에게 필요한 것들을

준비해 놓기에

하루밖에 출근하지 않지만

금세 모든 이들이 좋아했다  


손에 요리가 익으려는 찰나

퇴근시간이 가까워온다

"모두들 안녕!

다음 주 화요일에 봐요"


바쁜 하루를 마무리하며

동료들에게 인사를 건넨다


#빈 틈이 있는 수요일

이틀 간의 육체적으로 힘들었던 일정

수요일은 몸이 잠시 쉬는 시간이다


이젤과 그림도구를 챙기며 나가는데

아버지가 묻는다

"그렇게 해서 하나라도 제대로 할 수 있겠니?"

아버지는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듯 물었다

아마도 아버지는 딸이 한 가지 일이라도 제대로 하는지 걱정이 되었다


"아빠 시대에는 그 시대에 맞는 직업상이 있었겠죠

제 시대에는 다른 모습이 있어요

굳이 아버지 시대의 잣대에 저를 맞추지 말아 주세요!"

서영이는 새초롬한 표정을 지으며 얼른 신발을 신었다


"남들은 일상이 지겹다지만 제게는 그럴 시간이 없어요

늘 다른 일, 다른 사람들을 마주하니까요

마친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가 토끼굴을 타고 다른 세계로 이동하듯

저는 매일매일이 다른 세상에 사는 느낌이에요

지루함이라고는 들어갈 틈이 없는 그런 꽉 찬 일상 말이에요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을까요?"


아버지는 서영이에게 뭐라 하지만

서영이는 절대 개의치 않는다

그녀에게 세상의 시선이라 그저

관심으로 밖에 보이지 않으니 말이다


집 근처 공원 벤치에 앉았다

바삐 지나가는 사람들

시원한 바람

눈 앞에 펼쳐진 초록 잔디밭


그림을 그리고 있는 서영이에게

이토록 평화로운 시간이 없다

 

오늘도 뚝딱 그림 하나를 해치운다

추상화도 아닌 세밀화도 아닌

반쯤 채워진 그림

선으로 스케치를 마치고

반쯤 색칠을 하다

집으로 돌아온다

나머지는 다음 주 화요일 다시 그려볼 생각이다


#흥이 넘치는 목요일

오늘은 어제 비축해둔 에너지를 마음껏 발산하는 날이다

이미 연습장에는 친구들이 나와 있다


"오늘은 이 부분 연습하는 날이지?"

"너 연습할 시간은 있었어?"

댄스 클럽 친구들은 에너지 넘치는 서영이가

매일매일 다른 일을 하고 있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들은 서영이가 에너지 넘치는 친구지만

한 번에 여러 가지 일들을 잘 해낼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친구들의 우려와 달리

서영이는 다른 아이들과 함께 안무를 맞춰본다

"연습 좀 했네! 아주 엇나가지 않는걸?"

서영이는 친구 등을 치며

"나 서영이야! 다음 파트도 기대하라고!"

자신감 있게 자기 파트를 소화해 낸다


친구가 물었다

"서영아 너는 어떤 안무를 만들고 싶니?"

"내가 꿈꾸는 목표는 멋있는 안무를 만드는 건 아니야

못 만들어도 상관없어

나답게 만드는 것

내 느낌이 살아 있는 안무를 만드는 게 목표야

이건 참 서영이스럽다

그런 칭찬을 듣고 싶어

잘 만들었다가 아니라"


#예술을 만드는 금요일

비쥬 공방을 찾았다

어렵게 찾은 공방이었다

기계에서 액세서리를 만들어내서

만드는 곳이 별로 없었는데

뛰어난 감각을 갖고 계신 장인이 계셔서

명백을 유지하는 공방이었다


"그래 서영이 왔니?"

"네 선생님 준비해주신 재료로

이렇게 만들어봤어요!"

"음 아직 조금 부족하지만

그래도 느낌이 있네

오늘도 한 번 잘 만들어보자"


서영이는 기계가 사람의 일을 대신한다고 하더라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어쩌면 로봇이 모든 일을 대신한다고 해도

사람과 사람을 잇는 일만 나중에 남게 되는 것은 아닌지

생각했기 때문이다


비쥬 역시 그런 작업의 하나였다

공예라는 활동을 매개로

서로 다른 이들이 하나의 예술작품을 만들어가고

그 속에서 의미를 찾는 일


기계가 만들어낸 천편일률적인 작품이 아니라

사람 냄새가 나는 그런 작품 말이다


문득 서영이는 일상에서

매일매일 다른 직업을 갖는 것이

비쥬에 엮이는 각기 다른 장식품처럼

서영이의 삶을 빛나게 해주는 원동력은

아니었을까 생각이 들었다


어느덧 공방 식구들과 담소를 나누다 보니

하루가 금세 지나가버렸다

다음 주를 기약하며 내일을 준비하러 집으로 돌아간다



#주말이 시작되는 토요일

공항 가는 버스에는 캐리어를 들고 어디로 떠나려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서영이 역시 공항버스를 타고 출근하는 중이다

사람들 표정에서 여행을 앞둔 설렘이 보인다


오늘은 동남아 노선이다

가오슝 왕복행 비행기다

오전에 갔다가 오후에 돌아오는 비행 편이다


가오슝이라

어릴 적 가족들과 함께 갔던 곳이다


맛있는 음식으로

나에게 기쁨을 주었던 곳

특히나 양파 향이 어우러진 부침이

기억에 많이 남았었다


공항에 도착해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는 다음 비행 편을 준비한다


비행 편을 이동해 여러 나라를 이동하다 보니

시차가 생긴다


가오슝에 가니 한 시간 전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인천에 도착할 때는 한 시간 뒤로 간다


타임머신을 타고 이동하듯

시간을 뛰어넘는 느낌이다


'진짜 타임머신이 생긴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

서영이는 인천 돌아가는 비행 편에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긴다


#글과 함께 마무리하는 일요일

쉼 없이 달려온 일주일

바쁜 삶을 글 속에 녹여내는 날이다

다른 날은 사람들과 어울렸다면

마지막 날은 철저히 혼자다

혼자만 남아있을 때 진짜 나에게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안된다고 하지만

난 소설 속의 인물처럼 일상을

소설로 만들며 살아간다'


'아직은 그저 글이 취미에 불과하지만

언젠가는 내 글이 남들에게

유익한 영향력을 주리라 믿는다'


남들의 질투와 시기는 어쩌면

'본인은 한 가지에 일에 매여 있기에 겪는

어려움 아니면 답답함에서 나오는 부러움 아닐까?'

안된다고 생각하면 모두 안되고

된다고 생각하면 모두 된다

된다 안된다를 판가름하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이다


서영이의 노트는 이런 자신감과 함께 한 줄 한 줄 채워져 나간다

밤이 깊어간다

안경 쓴 빨강머리 앤의 일주일은

월요일부터 다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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