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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상예술가 정해인 Mar 11. 2019

#70 마음에도 없는 꽃

100d 100d project

큰 아이가 학교 가는 길에 가방에 든 물병을 떨어뜨렸다.

나는 분명 가방을 들기 전에 신발을 신으라고 했다.

신발을 신으려고 허리를 숙이면 가방에 들어 있던 것들이 모두 떨어지게 된다고 여러 번 말을 했었다.

하지만 아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허리를 굽히다 예상했던 결과가 일어났다.

문 밖을 나서기 전에도 분명 주의를 주었는데 문 밖에서 또 그러니 나도 모르게 화가 일어났다.

그리고는 나도 모르게 잔소리가 발사되었다.

아들의 얼굴에서 못마땅한 표정이 역력하다.

'이러려고 이야기했나?' 약간의 회한과 답답함이 밀려온다.

그렇게 서로 언짢은 얼굴로 나는 아이와 헤어져 사무실로 발길을 돌렸다.


바쁜 월요일 아침 이런 기분으로는 일이 잘 잡히지 않을 듯하다.

그림 수첩을 꺼냈다.

오늘의 주제는 바로 꽃.

꽃이라 무슨 꽃이 있을까?


아침에 차 한잔을 하려고 꺼냈던 사과차를 보니 포장지에 꽃이 그려져 있다.

하지만 내키지 않는다. 주제가 꽃인데 꽃이 배경화면처럼 보인다.


스마트폰을 꺼내 본다.

어제 찍은 꽃 사진이 보인다.

하지만 이것도 아니다. 

'물에 젖은 저 촉감 어떻게 살리겠나? '

그림을 그리다 스트레스만 더 증폭시키겠다 싶어 접었다.


한참을 더 뒤적였다.

분홍빛이 화사하긴 한데 이것도 아니다

무언가 알맹이가 빠진 느낌이다.

1년을 지나 2년을 지나 그렇게 오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다 얼마나 오래되었는지도 모를 꽃 사진 하나를 찾았다.


고체 물감 코이 재시작. 스케치는 1/3쯤 하다 말고 그냥 색칠하다. 꽉 채우지 않아도 일부만 그려도 내 그림이니까

날짜를 보니 2015년 연말에 고체 물감을 이제 막 쓰기 시작했던 시절이었다.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꽃 모양이 정말 예쁘게 그려졌다.

'이거 잘 그려야 본전인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미 내 손은 스케치 노트를 향해 가고 있었다.

마음속에서도 이미 스케치가 절반은 그려져 있었다.

스케치를 마치고 나서 예전 그림과 비교해 보았다.

그냥 지나가야 하는데 나도 모르게 비교가 되었다.

'더 잘 그린 걸까?' 도무지 모르겠다.

'그냥 여기서 끝낼까? '

'색연필로는 고체 물감만큼 아니 수채화만큼 잘 칠해낼 자신이 없는데? '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다. 그럴 때는 그 일이 사회적으로 죄악시되는 일만 아니라면 해 보는 게 우선이다.

누가 색깔 칠한다고 뭐라 할 것도 아닌데 그런 건 고민이 아니다.


색연필을 들었다.

3가지 꽃의 색깔이 모두 다른데 생각만큼 느낌이 잘 안 나온다.

그나마 오른쪽 꽃은 실제는 더 어두운 색깔로 칠해졌는데 스캔을 하다 보니 조금 밝아졌다.

잎의 느낌은 녹색을 살리고 싶었는데 실제가 아닌 인공 잎이 되어버린 느낌이다. 

그렇게 색연필을 마치고 났는데 아들 생각이 났다.

마음에도 없는 꽃을 그리고 있다니 마치 아빠라는 내가 가식적인 사람처럼 느껴졌다.

아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성인이 된 나도 실수를 많이 하는데 아들에게 너무 무리한 것을 요구한 것은 아닐까?

집에 가면 아들에게 사과를 하고 미안하다고 전해야겠다.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너에게 화를 낸 것은 내 잘못이라고 말이다. 

아들에 대한 미안함과 함께 마음에도 없는 꽃 그림을 마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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