씀씀이가 인생을 말하다.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지갑에도 통장에도 늘 돈이 없었다.
분명 월급은 매월 받는데 수중에 남은 돈은 얼마 보이지 않았다.
그래선 나는 어디에 쓰는지 기록을 시작했다.
#가계부 1단계 거래의 기록
3/28 pc방 2천 원, 오렌지 3천 원 잔액 58천 원
줄이 쳐진 노트에 이렇게 매일매일 적어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달을 적어 보니 문제가 하나 보였다.
어떤 항목에 어떻게 쓰는지 알 방법이 없어서 답답했다.
어디에 썼는지는 알았지만 줄여야 할 항목이 일목요연하게 보이지 않았다.
#가계부 2단계 항목의 분류
그동안 써 왔던 내용을 가계부로 정리했다.
처음에는 그저 입금과 출금 그리고 잔액으로 정리했다.
하지만 양이 많아지고 분류가 필요했는데 일일이 검토하기가 귀찮아 아예 각 항목별로 금액이 자동 집계가 되도록 함수를 이용했다.
그렇게 매월 매월의 집계를 내다가 문득 나는 얼마나 갖고 있지라는 의문에 휩싸였다.
매번 다른 회사의 재무제표는 조사하면서 정작 나의 재무제표는 한 번도 작성해 본 적이 없었다.
(물론 최근에는 재산등록으로 인해 매년 순자산과 재산의 증감까지 검토해야 하는 상황이 되기는 했지만 말이다.)
#가계부 3단계 예산 수립, 대차대조표, 순자산
매월 순자산의 증감을 기록하고 현시점의 금융 자산의 순금액을 엑셀에 실시간으로 표시했다.
그래 봐야 '자산 - 부채'의 간단한 식이다.
회사와 같이 유동자산, 유동부채로 분류할 것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예금과 투자자산 일부에 불과했다.
보험은 소멸성 자산으로 보아 재산으로 처리하지 않고 모두 비용으로 처리했다.
퇴직금이나 연금 또한 없는 자산으로 보고 실제 현시점에 융통할 수 있는 금액만 자산으로 보아 보수적으로 처리했다.
물론 빚에 해당하는 금액도 모두 관리했다. 특히나 모임 회비와 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부채도 빼먹지 않아야 했다.
그렇게 20년이 넘도록 가계부를 써오게 되었다.
가계부가 큰돈을 불려주지는 않지만 최소한 나가는 것은 막아주고 있는 듯하다.
가계부의 흐름을 보니 내 인생이 보인다.
처음 가계부를 썼을 때는 지출 1순위가 술값이었다.
선배들 그리고 친구들과 술 마시는데 많은 돈을 쓰고 있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술자리를 줄이고 술을 덜 먹기로 했다.
아내를 만난 이후에는 교제비가 1순위로 올라왔다.
하지만 결혼을 약속하며 결혼 비용이 잠시 1순위를 기록하더니 이내 주거비가 1순위로 치고 올라왔다.
몇 년이나 주거비의 비중은 줄지 않다가 변수가 하나 등장했다.
아이들이 태어나고 유치원에 들어가면서 육아비가 1순위를 탈환했다.
그 뒤로 아이들 교육비와 육아비는 1순위의 자리를 내주지 않고 있다.
아마도 당분간은 그 자리를 유지할 태세다.
아이들이 비키고 난 다음 1순위는 어떤 비용이 차지하고 있을까?
가계부의 씀씀이에서 내 인생이 묻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