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만, 눈치껏 쓰시라고요
1.
메일 창을 열어 놓고도, 한참 동안 본문을 쓰지 못했다.
[문의] 투모로우 페이퍼 포럼 참석 관련
처음에는 로또, 주식, 홍대 간판, 터널 사고까지. 내가 겪은 일을 전부 다 써 내려가려다가 작성한 문장을 몽땅 드래그해서 지워버렸다.
‘저쪽은 이미 내가 뭘 했는지 다 알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굳이 내가 먼저 다 까발릴 필요는 없지.’
결국 여러 번 지우고 다시 쓴 문장은, 이 정도였다.
안녕하세요. 신문을 구독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포럼 참석 자격 및 절차가 궁금합니다.
'딸깍-'
보내기 버튼을 클릭하고 메일이 떠나가는 파란 아이콘을 보자 가슴이 메슥거렸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냐..’
내가 초대장을 받은 건지, 이미 오래전부터 정해진 자리로 끌려가는 건지 구분이 안 됐다. 노트북을 덮으려는 순간, 메신저 알림 소리가 났다.
“벌써?”
받은 메일함 상단에 새 메일 1.
보낸 사람: Electa
제목: [RE] 투모로우 페이퍼 포럼 참석 관련
심장이 괜히 한 박자 늦게 뛰었다. 나는 마우스를 움직여 메일을 열었다.
환영합니다. 수령자 05님.
연락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포럼 시간과 장소는 아래와 같습니다.
– 시간: 금요일 오전 7시
– 장소: ○○호텔 17층 프라이빗 다이닝
※ 유의사항
- 동반 입장은 불가합니다.
- 내일 신문 1부를 지참해 주시기 바랍니다.
- 포럼에서 나눈 이야기는 “내일을 모르는 사람들”에겐 공유할 수 없습니다.
내일을 아는 사람들끼리는 굳이 많은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메일을 읽는 내내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감각이 내려갔다.
‘연락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노트북 화면을 덮지도 못한 채 한동안 의자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금요일 오전 7시. 이 조찬 모임에 참석한다는 건, 내가 완전히 ‘저쪽 세계’로 넘어가겠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저쪽은 완전한 미지의 세계다. 누가 있을지, 몇 명이 있을지, 어떤 사람들이 모여 있을지 나는 단 하나도 모른다. 과연 맨몸으로 가도 되는 걸까?
2.
“내일 신문?”
정민은 처음엔 웃었다.
“요즘 소설 써? 아이템은 나쁘지 않은데, 호러물로 써도 되겠다.”
당연한 반응이다.
“진짜야.”
나는 결국 다 꺼냈다. 홍대 간판 사건, 터널 사고, 그리고 스마트폰에 저장해 둔 로또 1등 복권 사진까지.
정민은 처음엔 “설마..” 하다가, 내가 신문 두 장을 꺼내 들고, 오타 난 기사와 바뀐 기사 제목들을 차례대로 보여주자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결정적으로 스마트폰으로 통장 잔고를 보여주자 의심의 눈초리는 완전히 사라졌다.
“이거.. 꿈 아니지?”
“나도 가끔 그렇게 생각하긴 하는데, 통장 잔고가 꿈이 아니더라.”
“이런 신문은.. 누가, 왜 보내는 거야?”
“그건 아무도 몰라. 중요한 건, 내일 그 단서를 조금이라도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거지.”
나는 휴대폰 화면을 뒤집어 보여줬다. Electa의 답장 메일.
“모임에 나갈 거야?”
정민이 조용히 물었다.
“위험하지 않을까? 뭔가, 영화에서 보면 이런 거 다 위험하던데.”
“위험할 수도 있지. 근데 안 간다고 해서 피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아.”
말을 하다가, 나도 모르게 한숨이 섞였다.
“게다가.. 나도 너무 궁금해. 이게 뭔지, 어디까지인 건지.”
정민이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물었다.
“그런데, 이걸 왜 나한테까지 다 말해주는 거야?”
“.. 위험하니까.”
말이 툭 튀어나왔다.
“만약 내가 정말로 돌아오지 못하면.. 부모도 없고, 형제도 없고, 믿을만한 친구도 없는데.. 그래도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이 한 명은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정민이 눈을 크게 떴다. 나는 덧붙였다.
“그리고.. 너한테는 숨기고 싶은 비밀이 없어. 이상하게 그게 싫더라.”
잠시 침묵이 흘렀다.
“같이 갈까?”
정민이 장난 반, 진심 반의 얼굴로 말했다.
“안 돼. 규칙이야. 혼자 와야 한대.”
나는 일부러 가볍게 웃었다.
“만약 내가 연락이 안 되고 못 돌아오면.. 내 집, 자동차, 예금은 네가 처리해 줘. 신문도 네가 받아. 계속 올진 모르겠지만.”
“아우, 그만해! 무슨 전쟁 나가는 사람 같아.”
정민이 나를 툭 쳤다.
“일단 알았으니까, 앞으로 어떻게 할지는.. 같이 고민해 보자. 도망칠 수도 있는 거고, 그렇지?”
“응. 일단, 내일 아침까진.. 안 도망가 볼게.”
3.
○○호텔 17층. 프라이빗 다이닝.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복도 끝에 ‘PRIVATE’라고 적힌 금색 플레이트가 보였다. 문 앞에는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가 한 명 서 있었다.
“혹시 투모로우 페이퍼 포럼?”
내가 조심스럽게 묻자 그는 내 얼굴보다 먼저 내 손에 들린 신문 묶음을 훑어봤다.
“수령자 번호 확인하겠습니다.”
“아.. 05요.”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05번. 참석 확인되었습니다. 들어가시죠.”
신분증도, 이름도 묻지 않았다. 오로지 ‘번호’만.
문을 열고 들어가자 호텔 레스토랑 한쪽을 막아 놓은 듯한 공간이 나왔다.
긴 타원형 테이블. 흰 식탁보. 구석에는 뷔페식으로 빵과 커피, 과일이 놓여 있었다. 이미 몇 명이 앉아 있었다. 세어보니, 나까지 일곱 명.
더블버튼 회색 양복을 입은 50대 남자.
화려한 실크 스카프를 두른 40대 여성.
눈매가 날카로운 30대 초반쯤의 안경 쓴 남자.
팔뚝이 유난히 두꺼워 셔츠가 끊어질 것 같은, 운동선수 체형의 20대 남자.
수녀복을 약간 변형한 듯한 옷차림의 60대 초반 여성.
그리고, 중학생에서 고1쯤으로 보이는 앳된 얼굴의 여학생 하나.
모두 각자 [내일 신문]을 한 묶음씩 들고 있었다.
“05번, 오셨네요.”
테이블 끝쪽에 앉아 있던 안경 쓴 남자가 말을 건넸다. 회색 슈트에 깔끔한 인상.
“처음 뵙겠습니다.”
“아, 안녕하세요.”
자리를 안내받아 앉자, 내 앞에도 작은 명찰 하나가 놓여 있었다.
05.
둘러보니 사람은 일곱 명인데, 숫자는 11까지 있었다.
01. 02. 04. 07번 자리가 비어있었다.
'아직 안 온 사람들이 있는 건가..'
사람들을 더 기다려야 하나 생각했을 때 안경 남자가 말을 꺼냈다.
“여기서는 이름을 쓰지 않습니다. 번호로만 부릅니다. 이미 번호는 자리 앞에 있으니 확인하셨을 테고.
바로 본론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가 나를 정면으로 쳐다봤다.
“05번 님. 오늘 모임은, 사실 당신 때문에 마련된 자리입니다.”
“네? 저요?”
“네. 그렇습니다.”
안경 남자는 미소를 아주 옅게 지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나를 쳐다봤다.
“저희는 이미 오래전부터 신문을 받아보고 있었습니다. 최근에 새로운 수령자가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게 누군지 알 수는 없었죠. 그래서 신문에 주기적으로 공지를 냈고, 언젠가는 알아채고 연락을 해올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음..”
“뭐, 긴장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수령자들의 ‘규칙’을 전달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규칙만 잘 지키면 안전합니다. 지금처럼 아주 행복하게 살 수 있죠. 크크.”
규칙? 안전? 이상하게 경고처럼 들렸다.
안경 남자가 질문했다.
“05번 님. 이 신문을 받고 어떤 일들을 하셨죠?”
“그, 그건..”
나는 잠깐 망설이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주식을 좀 사고, 복권도 사고..”
어느새, 내가 샀던 종목과 금액, 로또 당첨 이야기까지 주저리주저리 쏟아내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자세히 말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그런데 놀랍게도, 누구 하나 지루해하는 기색이 없었다. 모두가 조용히, 그것도 아주 집중해서 내 말을 듣고 있었다. 복권 이야기를 할 때는 옅게 미소를 띠는 이도 있었다. 아마도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그리고 또요?” 안경 남자가 물었다.
“아! 사람을 구했습니다.”
그 순간, 테이블에 앉은 모든 사람의 표정이 동시에 꿈틀 했다. 누군가는 입술을 질끈 물었고, 누군가는 눈썹이 올라갔다. 분명히 꽤 큰 돌을 던진 게 틀림없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분명히 이상한 분위기임을 감지한 나는 정민을 구했던 홍대 간판 이야기를 최소화해서 이야기했다. 터널에서 죽을 뻔했던 사람들을 구했던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았다.
"그게 전부입니다."
무표정한 듯, 비웃는 듯, 알 수 없는 표정들. 잠시간의 정적이 흐른 뒤, 안경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부터 규칙을 전달하겠습니다.”
“네..”
“첫째.”
그가 손가락 하나를 세웠다.
“돈의 스케일을 욕심내지 마세요.”
“소소하게 주식으로 재미 보는 정도, 생활이 조금 나아지는 정도까지는 괜찮습니다. 하지만 판이 너무 커지면 곤란해요. 시장이 출렁이거나, 기업 하나의 운명이 통째로 바뀌는 수준까지 가면.. 반드시 ‘정산’이 따라옵니다.”
정산. 그 단어가 이상하게 귓가에 남았다.
그의 두 번째 손가락이 올라갔다.
“둘째. 생명과 역사는 손대지 마세요.”
“사고를 막는다거나, 죽을 사람을 살린다거나, 선거 결과나 전쟁, 대형 참사 같은 걸 바꾸려는 시도들요.
그건 이 신문이 가장 민감해하는 영역입니다.”
내 심장이 살짝 내려앉았다.
“미래를 ‘살짝’ 비트는 정도, 예를 들어 길을 돌아간다거나, 손해를 피한다거나 하는 수준은 괜찮습니다. 하지만 죽을 사람이 안 죽는다, 떨어질 권력이 안 떨어진다.. 이런 식으로 축 자체를 틀어버리면 신문에도 균열이 생기고, 그 균열은 결국 수령자 쪽으로 돌아옵니다.”
나는 손을 들었다.
"그럼 주식은, 얼마 정도까지 하면 되는 건가요?”
“그런 건 정확히 알 수 없어요.”
안경 남자가 씩 웃었다.
“눈치껏 해야죠.”
팔뚝이 터질 것 같은 20대 남자가 대신 대답했다.
“음..”
“만약, 크게 미래를 손대면 어떻게 되는 건데요?”
이번에는 내가 먼저 물었다. 순간,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이 동시에 나를 쳐다봤다. 표정은 무표정에 가깝지만, 공기가 싸늘해지고 한기가 도는 느낌이었다. 안경 남자가 짧게 대답했다.
“크게 다칩니다. 죽을 수도 있고요.”
“네?”
“능력을 과하게 쓰다가 스스로를 망가뜨린 사례들은, 생각보다 많습니다. 너무 큰돈을 굴리다가 사라진 사람들.. 죽을 운명이었던 사람을 계속 살려두려다 같이 끌려 들어간 사람들..”
그 말이 끝났을 때, 그제야 빈 의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숫자는 있는데, 사람이 앉아 있지 않은 자리들. 더 이상 설명을 듣지 않아도 직관적으로 이해됐다.
‘지금 빈자리들.. 설마 다, 규칙을 어긴 번호들인가.’
4.
돌아오는 길, 나는 호텔 엘리베이터 유리에 비친 내 얼굴을 한참 쳐다봤다.
‘일단.. 살아서 나가는구나.’
규칙을 다시 한번 떠올려봤다.
대충 정리하면, 1번은 ‘돈’, 2번은 ‘생명과 역사’였다.
돈은 욕심을 줄이면 되지만, 생명과 역사는.. 내 양심 문제였다.
신문을 받는 사람은 나 말고도 최소 여섯 명. 우리는 서로 번호로만 알고 이름은 모른다.
신문에는 분명 규칙이 있고, 그 규칙을 어긴 사람들은 죽거나, 실종되거나, 기록에서조차 지워진다.
그게 다른 수령자들의 짓인지, 편집부의 정리인지, 아니면 그보다 더 위의 ‘무언가’ 때문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단지, 너무 많이 사용하면 오래 못 간다는 어떤 공포만이 암묵적인 룰처럼 공유되고 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서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규칙은 들었는데.. 그건 수령자들끼리 만든 거고.. 진짜 룰북은 여전히 저쪽 편집실에 있겠지.’
손에 쥔 신문 가장자리가 땀에 조금 젖어 있었다. 나는 손으로 그것을 한 번 꼭 쥐었다.
“그래. 일단은.. 눈치껏.”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해놓고도, 머릿속 어딘가에서는 이미 규칙의 빈틈을 찾고 있는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