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어 라이크
"카푸어 알아요? 좋은 차 타고 싶어서 월급 죄다 때려 박는 얘들이요.
월급 200 받으면 한 150을 차 할부금 갚는데 쓰는 거죠. 그 돈으로 BMW나 벤츠 타고 나머지로 라면 먹으면서 사는 건데, 뭐 내일 없이 오늘만 사는 거죠. 폼생폼사."
“알지. 다들 정신 나간 놈들 아니야? 본인들은 욜로(YOLO)라고 부르겠지만.”
"그런 얘들을 전부 모아서 서울 시내에서 카레이스를 시켜보는 건 어때요? 일등 하면 대출금 다 까주는걸 상금으로 걸고."
"크크 재미는 있겠네. 헛소리 그만하고 밥 먹자"
후배와 함께 점심식사를 하면서 나눈 대화중 일부.
그런데, 그저 웃자고 나눈 대화였지만 나는 [카푸어]라는 아이템은 꽤나 재미있다고 느꼈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 그들에 대해 좀 더 찾아봤다. 예상대로 거의 대부분은 그저 오늘만 사는 허세가 가득 찬 대책 없는 친구들이었다. 그런데. 걔 중에는 꽤나 괜찮은 친구들이 있는 게 아닌가!
"전 BMW를 타려고 투잡 쓰리잡을 뛰어요. 이것 때문에 담배도 안 피고 술도 거의 안 마셔요.
좋은 차는 제가 열심히 살게 만드는 동기부여예요. 부모님 도움 없이, 제가 번 돈으로 타는 건데 왜 욕먹어야 하죠?”
흠.. 듣고 보니 틀린 말 하나 없었다. 누구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좋은 차가 열심히 사는 원동력이 된다는데 이건 오히려 칭찬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카푸어를 시작으로 ‘무언가에 푹 빠져 현재의 수입을 전부 쏟아붓는 사람들’, 이른바 각종 ‘푸어’들을 더 찾아봤다.
자동차, 패션, 미식, 취미, 클럽, 성형까지.
미래보다 현재에 더 충실한 젊은이들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았다.
오.. 이거 재미있겠는데?
방송 아이디어는 오랜 고민 끝에 완성되기도 하지만, 이렇게 느닷없이 뜬금없이 튀어나오기도 한다.
나는 ‘자신의 취향에 올인하며 사는 젊은이들’을 정면으로 보여주는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어찌 보면 화성인 같기도 한 친구들, 그들의 소비철학을 들어보자! 다들 손가락질하지만 그들의 솔직한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해할 수도 있다.
다양한 세대로 구성된 100명의 일반인 판정단들에게 그들의 삶이 이해 가는지, 응원해주고 싶은지 최종 판단을 들어보자!
판정단 한 명이 출연자에게 공감할 때마다 그들이 누른 좋아요(LIKE) 버튼은 10만 원의 상금으로 지급한다. 즉, 출연자가 판정단에게 인정받을 경우 최고 1,000만 원의 상금을 가져갈 수 있다. 인스타그램의 공감 지수를 현금으로 바꿔보자는 발상이었다.
후배와 나눈 대화를 바탕으로 기획안을 후다닥 작성했다. 그리고 마침 찾아온 기획안 피칭날에 발표를 했고, 감사하게도 1등을 거머쥔다.
그렇게 론칭한 프로그램이 바로 [푸어라이크]
김구라, 이지혜, 도경완. MC 라인업도 나쁘지 않았다.
카푸어, 클럽푸어, 미슐랭푸어, 성형푸어, 하우스푸어까지. 별별 푸어들이 다 나왔다.
첫 회 푸어는 23세 여성. 일주일 중 3일 이상을 클럽에서 보내는 이른바 [클럽푸어]였다.
그녀의 급여는 300만 원 이상으로 나이에 비해 꽤 많이 받았는데, 그녀는 그 돈의 거의 80% 이상을 클럽에 갖다 바치고 있었다. 당연히 처음 보는 사람들은 손가락질하며 혀를 찼다.
그런데 그녀의 속마음을 듣다 보니 분위기가 달라졌다.
그녀가 아이돌 연습생으로 수년간 오로지 춤과 노래만 연습한 끝에 안타깝게도 꿈을 접었다는 사실.
친구들도 못 만나고 스파르타식으로 연습만 해서 지난 시간을 아쉬워한다는 것.
그래서 딱 1년만 미친 듯이 춤과 노래를 불러보겠다고 이야기하는 인터뷰를 들으면 사람들의 마음은 그녀를 응원하는 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한다.
이 프로그램은 별난 소비를 하는 기상천외한 젊은 친구들을 보는 재미도 있었고, 그들의 사연을 듣고 처음 느낌과 다르게 공감하게 되는 반전의 묘미도 제법 있었다. 게다가 팍팍해진 세상에서 젊은이들이 현재에 만족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시대상까지 담고 있었다. 와우~
그래서.
시청률은 잘 나왔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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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살! 났다..
크크. 쓰면서도 어이가 없네.
방송은 6회 만에 종영되었다. 예전에는 방송 시청률이 잘 안 나오면 구성도 바꾸고, 출연자도 바꾸고, 때론 편성도 바꿔가면서 프로그램을 살리기 위한 많은 시도를 했지만, 지금은 어림도 없다. 그렇게 여유롭게 기다려줄 만큼 미디어시장이 한가하지 않다. 처음부터 반응 없으면 바로 아웃이다.
[유쾌한 삼촌], [같이할래? GG], 그리고 [푸어라이크]까지. 이제 나는 방송국에서 '너 이제 그만 나가라' 해도 할 말이 없는 처지였다.
그래도 마음씨 좋은 분들이 계신 곳이어서인지 다행히도 나는 여전히 방송을 제작하고 있다. 감사합니다..
방송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과정은 무척이나 재미있다.
어떤 기획은 수개월의 고민 끝에 나오고, 어떤 기획은 점심시간 농담 끝에 탄생한다. 그런 예측할 수 없는 면도 흥미로운 지점이다.
아. 당시 우리 본부는 PD들이 기획안 발표를 해서 1등을 하면 제작 기회를 주는 시스템이었는데, [푸어라이크] 이후 이 제도는 사라졌다.
음.. 나 때문은 아니겠지?
아닐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