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누군가의 전구에 불을 켜는 이야기

by 채PD


1.

못생긴 여자를 사랑할 수 있을까.

이 되먹지 못하고도 천박한 질문에 과연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이 소설은 바로 그 질문에서 출발한다. 못생겼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고 조롱과 멸시 속에서 살아온 한 여자와, 번듯하게 잘생겼지만 성공을 위해 가족을 버린 아버지 때문에 깊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한 남자, 그리고 이 두 사람을 곁에서 지켜보며 서로를 이어주려 했던 또 다른 한 남자. 소설은 이 세 청춘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너무 쉽게 받아들여 온 세계의 기준을 조용히 흔들어 놓는다.


작가는 책의 말미에서 이 이야기를 “잘생긴 남자와 못생긴 여자의 러브스토리라는 비현실적인 이야기”라고 고백한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이 이야기를 충분히 현실적인 이야기로 만들어낼 수 있는 존재라고 말한다. 그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가능성이며, 재능이며, 힘이라는 것이다. 소설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단순하다. "우리가 진짜로 사랑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가 아름답다고 믿어 온 것은 과연 얼마나 진짜인가".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을 맹목적으로 숭배해 왔다. 아름다운 얼굴과 균형 잡힌 외모는 언제나 찬탄의 대상이 되었고, 그 기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난 사람들은 쉽게 조롱과 배제의 대상이 되곤 했다. 작가는 바로 그 지점을 날카롭게 찌른다. 외적인 아름다움을 절대적인 가치처럼 떠받드는 순간, 우리는 오히려 스스로를 시시한 존재로 만들고 있는 것이라고.


그래서 그는 외적인 아름다움을 ‘시시한 것’으로 바라볼 수 있는 용기를 이야기한다.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빛을 발견하고, 스스로 빛을 내고, 서로가 서로에게 빛이 되어주는 관계가 진짜 아름다움이라고 제3의 남자 요한의 입을 빌려 말한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아직 전기가 들어오지 않은 전구와 같은 거야.
전기만 들어오면 누구라도 빛을 발하지.
그건 빛을 잃은 어떤 전구보다도 아름답고 눈부신 거야. 그게 사랑이지.


인간의 영혼을 전구의 필라멘트에 비유한 이 문장이 나는 가장 오래 마음에 남았다. 사랑이란 누군가를 빛나게 하는 힘이며, 어쩌면 우리가 서로에게 해 줄 수 있는 가장 인간적인 행위라는 것. 누군가는 그저 전기가 공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빛을 발하고 있지 못하다는 통찰. 이 얼마나 멋진 비유인가.


두 딸아이를 처음 품에 안았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커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아이들이 부디 예쁘게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부모라면 누구나 같은 마음이지. 다만 문득 돌아보게 된다. 그 바람이 혹시 외적인 아름다움에 너무 치우쳐 있었던 것은 아닌지 말이다. 아이들이 자라며 듣게 될 수많은 말들 속에서, ‘내적인 아름다움을 가꾸라’는 조언은 분명 필요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쩌면 타인의 숨겨진 빛을 알아볼 줄 아는 사람이 되라는 말이 아닐까.

세상에는 아직 불이 켜지지 않은 전구처럼, 누군가의 시선과 마음이 닿기만을 기다리며 조용히 빛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을 테니까.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우리는 정말 못생긴 여자를 사랑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우선 '못생긴'이라는 말의 정의부터 내려야 할 것이다. 뭐 사실 사전적 정의를 찾아볼 필요도 없다. 그저 잘생겼다. 이쁘다와 같은 말에는 당신이나 나나 비슷한 이미지를 머릿속에 그리고 있을 것이니. '못생겼다'는 것은 그에 미치지 못하는 것일 테고. 하지만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외적인 미의 기준은 시대에 따라, 지역에 따라 끊임없이 바뀌어 왔다는 점이다. 불과 백여 년 전만 해도 지금과는 꽤 다른 기준이 존재했고, 더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그 차이는 훨씬 커진다. 문화권에 따라서도 기준은 크게 달라진다. 아프리카의 어떤 지역에서는 오히려 풍만한 몸을 최고의 아름다움으로 여긴다. 다산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외적인 미의 기준은 시대와 지역, 문화에 따라 계속 변해 왔다. 그렇다면 내적인 아름다움의 기준은 어떨까. 아마도 그 기준만큼은 크게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떤가. 느껴지는 바가 있지 않은가.


소설 속 그녀가 남긴 긴 편지를 읽으며 놀라움과 함께 어떤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못생겼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인간이 얼마나 처절하게 핍박받고 소외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상처가 얼마나 깊을 수 있는지 너무나 생생하게 전해졌기 때문이다.


물론 외적인 아름다움을 선호하는 마음 자체는 어쩌면 인간의 DNA에 새겨진 본능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외모를 이유로 누군가를 비웃고 밀어내는 일만큼 천박한 일도 없지 않을까. 그래서 이 소설은 분명 비현실적인 이야기지만, 동시에 너무나 현실적인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바로 그 점 때문에 이 이야기가 현실이 되기를 바라는 작가의 마음에 자연스럽게 공감하게 된다.


2.

제목 역시 그런 의미를 품고 있다. 파반느(Pavane)는 16세기 유럽 궁정에서 추던 느리고 장엄한 춤으로, 엄숙하고 애도하는 분위기를 지닌 음악 형식이다. 그래서 흔히 죽은 이를 추모하는 장송곡처럼 연주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책 제목의 [죽은 왕녀]는 누구일까.


아마도 세상 속에서 이미 죽어버린 어떤 아름다움에 대한 은유일 것이다. 외적인 기준에 가려져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한 아름다움, 그러나 그 본질만큼은 여전히 빛나고 있는 아름다움 말이다.


책의 표지에는 스페인의 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즈가 그린 작품 [시녀들]이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은 독특한 구도와 시선의 구조 때문에 미술사에서 가장 신비로운 그림 중 하나로 꼽힌다. 훗날 피카소가 이 작품을 수십 점의 변주로 다시 그리면서 더욱 유명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그림의 미술사적 의미라기보다, 공주 앞에 서 있는 평범한, 아니 못생긴 시녀에게 시선을 옮기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작가는 왕녀가 아니라 그 시녀에게 조명을 비추고, 마치 그 시선 속에서 우리가 그동안 보지 못했던 또 다른 아름다움이 숨겨져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래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결국 이렇게 읽힌다. 세상이 외면하고, 그래서 마치 죽어버린 것처럼 취급해 온 어떤 아름다움에 바치는 슬픈 춤.


3.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청춘들의 이야기는 아날로그적인 감성과 서정성을 품고 있어 누구나 한 번쯤 겪어 보았을 서툴고 어설픈 사랑의 기억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소설은 마지막에 두 갈래의 이야기로 나뉘며 잠시 멈칫하게 만드는 반전까지 남긴다.


분량은 제법 두껍지만 끝까지 흥미롭게 읽히는 작품이다. 무엇보다도 책을 덮은 뒤에도 오래 마음속에 남아 같은 질문을 되묻게 만든다.

"우리는 정말, 못생긴 여자를 사랑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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