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름 짙은 초록색의 나뭇잎들은 나무의 모습을 한껏 아름답게 치장해주었다. 햇빛은 그런 나뭇잎들에게 알록달록 어여쁜 색을 선물해주었는데 그 예쁜 색에 심취해 있을 때쯤 나뭇잎들은 찬바람에 흩날리며 떨어져서 검은 아스팔트 도로 위를 알록달록 물들인다. 그 길을 따라 그곳에 다시 가게 되었다.
도착한 곳은 엄마가 소뇌위축증을 진단을 받고 치료를 위해 다녔던 병원. 건강상태가 나빠져서 입원을 하게 되며 처음으로 집이 아닌 낯선 곳에서의 생활을 시작한 곳이었다. 리모델링으로 외관이 조금 변하긴 했지만, 엄마와 함께 병원 이곳저곳을 바쁘게 돌아다녔던 기억이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생생하게 떠올랐다.
만약,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때의 엄마의 모습이 지금 여기에 정말로 나타난다면 나도 <천국보다 아름다운>의 영화 속 주인공이 자신을 그리워하다 자살로 죽어 지옥에 와있는 아내를 자기와 자식들이 있는 천국으로 데리고 온 것처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엄마를 다시 데려오려 애를 썼을 것 같다.
엄마가 떠나 간 후, 트라우마로 인해 이곳에 다시는 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몇 년 만에 우연히 온 이곳에서 엄마와 얼굴을 마주하며 예전처럼 웃고 떠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말도 안 되지만 말이 되었으면 싶은 상상을 해보며 그리움을 달래고 나니 마음이 한껏 가벼워짐을 느꼈다.
[아들러는 트라우마 이론을 부정하면서 이렇게 말했네. "어떠한 경험도 그 자체는 성공의 원인도 실패의 원인도 아니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받은 충격 -즉 트라우마-으로 인해 고통받는 것이 아니라, 경험 안에서 목적에 맞는 수단을 찾아낸다. 경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경험에 부여한 의미에 따라 자신을 결정하는 것이다"라고 <미움받을 용기, 고가 후미타케, 기시미 이치로, p24>]
죽음이라는 영원한 이별의 칼날에 나의 마음이 난도질당한 것 같았지만, 그것은 이별에 의해 그런 것이 아니라, 엄마의 죽음에 슬픔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슬퍼한 것 때문이었다. 이 사실을 처음엔 인정하기 싫었지만 소중한 이를 떠나보내고 지나가는 시간만큼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아간다.
떠난이와 남은이는 이제 같은자리에서 함께할 수는 없지만, 뜻하는 바는 오직 하나, 죽음이라는 이별의 슬픔의 늪에서 슬퍼하지 말고 각자의 자리에서 행복하길 바라는 것. 이 세상에서 주어진 시간이 끝난 먼 훗날, 어딘가 있을 천국 같은 곳에서 엄마와 함께 영원히 행복할 것임을 알기에 이제는 엄마와의 영원한 이별에 슬픔이라는 이름 대신, 희망이라는 이름을 조심스레 붙여본다. 그렇게 이별은 추억이 되어 마음속의 슬픈 빛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