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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수은 Nov 28. 2021

꿈을 꿨던 엄마의 미싱

2018년의 5월은 아파트 단지 담장을 따라 흐드러지게 핀 붉은 장미의 색이 선명해지는 만큼 슬픔도 짙어지는 봄이었다.
2015년 3월 소뇌위축증 진단을 받은 엄마는, 1년도 채 되지 않은 기간에 병세가 급격히 나빠졌다. 결국 스스로 움직일 수 없게 되었고 하루 24시간을 침대에 누워 생활해야만 했다. 1년 넘게 침대에 누워 지내던 엄마가 사용하던 환자 전용 침대를 병원에 입원하게 되면서 대여한 곳에 돌려주었다. 침대를 치운 공간엔 먼지만 수북이 쌓여있었는데 청소를 하려다 멈춰 서서 방 한구석 , 침대가 빠진 빈 곳을 물끄러미 보며 한참을 서있었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1평 남짓한 방 한구석의 깊이는 30m 바닷속처럼 너무나 넓게 다가왔다. 이때 느꼈던 슬픔이 너무 컸던 탓에 엄마가 영원히 떠나간 후 물건들을 정리하면 그 슬픈 허전함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졌고 엄마의 물건들을 미리 정리하기 시작했다.

'엄마'하면 떠오르는 물건에 대해 물어보면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미싱이라고 답한다. 엄마는 내가 태어나기도 한참 전부터 미싱을 돌렸다. 아무것도 아닌 천이 엄마의 미싱을 만나면 예쁜 인형도 되고 쿠션도 되고 하나의 쓸모 있는 것이 만들어졌다.
어릴 적 베란다에 놓인 미싱으로 인형, 핸들커버, 쿠션 같은걸 만드는 부업을 했었는데 엄마가 쿠션을 미싱으로 박아오면
나랑 동생은 안방에 앉아서 그걸 다음번에 작업이 편하도록 뒤집는 걸 도왔다. 그것을 100원 200원 받고 뒤집으며 용돈을 받았는데 어린 나이에 꽤 괜찮은 용돈 벌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쿠션 하나가 완성되면  10원 비싸면 50원 정도 받았던 것 같은데 엄마에게는 남는 장사는 아니었지 싶다.

엄마의 마지막 작품은 필통. 내가 첫째를 임신했을 때 엄마의 투병이 시작되어서 나는 매일 친정집에 가있었다. 그때 엄마의 운동을 돕기 위해 일부러 미싱을 가르쳐달라고 했고 둘이같이 미싱 앞에 앉아 만들었다. 특별히 준비한 천이 없어 예전에 부업거리를 하다 남은 재료들을 이용해 만들었는데,
같은 미싱이었지만 곧고 촘촘했던 예전의 박음질과는 달리 이 필통에 남은 박음질은 삐뚤빼뚤했다. 그 박음질에선 미싱의 페달을 밟으며 자신의 병을 이겨내고 싶은 안간힘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엄마는 손재주가 참 좋았다. 뜨개질도 잘해서 겨울에 목도리도 직접 뜨고, 내가 결혼할 때 신혼집의 커튼을 손수 만들어달아 주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집에서 미싱이나 돌리기엔 너무
아까웠던 솜씨라 뭐라도 했었으면 이름 꽤나 날렸을 거 같다는 생각도 든다.

친정집 지하실을 정리하다가 엄마가 오래전에 쓰다만 오래된 공책 한 권을 보았다. 그 공책엔 이런저런 이야기가 적혀 있었는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동대문 어딘가의 학원으로 자수를 배우러 다닌 이야기도 있었다. 누군가 자수를 배우면 평생 먹고살 걱정을 하지 않아도 이야기를 해서 배우러 다녔다는 내용이었는데 누구나 자신의 미래에 대해 걱정하듯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엄마도 자신의 미래를 위해 부지런히 준비를 했던 것 같다.

엄마는 항상 투박한 신발을 신었다. 발목이 불편한 탓에 평범한 사람들의 발에 맞춰 나오는 하이힐(예쁜 신발)은 신을 수 없었다.
신발 하나에도 제약이 있던  삶을 살았던 엄마가 만약 장애를 갖고 태어나지 않았다면, 무엇이 하고 싶었을까? 누구나 자신이 하고 싶은 것에 대해 꿈을 꾸듯, 20대의 꿈 많은 시절의 엄마도 꿈이 있었을 것이다. 비록 신체조건은 일반 사람들과 다르지만 신체조건이 다르다 하더라도 꿈을 꿀 수 있는 능력까지 없는 건 아니니까. 동생의 결혼식에서 엄마의 지인분과 이야기를 하다가 학교 다닐 때 엄마가 공부도 꽤 잘해서 동네 아이들의 과외도 했었다고 들었다. 다른 아이들의 과외를 할 정도면 대학에 가서 멋진 여대생이 되어 캠퍼스의 낭만을 누리는 풋풋한 20대 청춘을 누릴 수도 있었겠지. 조금만 시대를 늦게 태어났더라도, 엄마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생각을 좀 다르게 갖고 뒷바라지를 좀 해주었더라면 이렇게 손재주 좋고 영리한 엄마에게 장애 따위는 큰 걸림돌이 되지 않았을 것 같다.

엄마의 병간호를 위해 친정과 합가를 하면서 친정집에 있는 물건들을 정리해야만 했는데 그때 엄마의 미싱을 처분해야 해서
무척 서운했다. 내가 이렇게 서운한데 몇십 년을 함께한 미싱을 정리해야만 하는 엄마의 마음은 어땠을까. 병으로 더 이상 미싱을 할 수 없게 되었을 때의 그 상실감은 어떠했을까. 왜 그런 감정을 나누지 못했을까. 아마도 암묵적으로 동의했을 씁쓸함, 인생에 대한 허탈함, 그 슬픔에 젖어들기 싫은, 젖어들면 한없이 눈물을 흘릴 것이 뻔해서 눈물 흘릴 용기조차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 감정을 엄마와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이 못난 딸은 엄마를 떠내 보내고 나서야 비로소 조금의 용기가 났다.
그래서 묻지는 못하지만
엄마의 흔적들을 하나씩 쫓아가며
엄마에 대해 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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