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올해 7살 된 딸아이와 3살 된 아들이 있다.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에서 종종 나와 닮은 점을 보곤 한다. 나와 닮은 점을 보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긴 하지만 마음이 아플 때도 있다. 얼마 전 아이에게 어린이집에서는 어떻게 지내는지 물어보았다. 그 물음에 딸아이는 어떤 친구가 자신과 놀아주지 않는다고 답했다. 그 말을 하면서 그때의 일이 생각났는지 한참을 서럽게 울다 잠들었다. 딸아이가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지 알기에 너무나 안쓰러웠지만 한편으론 어떻게 아이를 달래주어야 할지에 대한 막막함 때문에 무척 당혹스러웠다.
부모로서 7살 아이가 친구관계에서 느꼈을 아픈 감정을 잘 달래 주고 앞으로 그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려주어야 한다는 이론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어떤 말로 아이의 마음을 달래 주어야 잘하는 것인지에 대해선 나 또한 그 답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덜컥 겁이 났던 것이다. 나 역시 어릴 적 친구관계에 상처가 있었고 딸아이가 속상해하는 모습에 다 나은 줄 알았던 상처가 다시 아파왔다.
나는 반에서 있는지도 잘 모를 존재감 없는 조용한 아이였다. 게다가 5학년 때 시작된 따돌림은 반이 6학년까지 이어지면서 이어졌고 그때 받았던 친구관계에 대한 트라우마로 6학년 때 자다가 이불에 실수까지 한 적이 있다. 다행히 중학교에 진급하면서 자연스레 그 문제는 해결되었고 내 기억 속에서 완전히 잊힌 줄 알았다. 하지만 그 상처는 여태 내 마음속 한 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 딸아이의 눈물에 잊었다고 생각했던 그때 일들이 고통이라는 감정을 가지고 되살아나 한동안 내 마음을 불안하게 뒤흔들었다.
그런 고민 때문이었는지 올여름은 유독 더 더웠던 것 같다. 하지만 힘든 나와는 다르게 시간은 평화롭게 지나갔고 어느덧 여름의 끝자락에 와있다. 조금씩 시원해지는 바람에 더위에 지친 몸은 평화를 되찾아 가지만 나의 마음은 아직 불안했다. 몸은 어른이 되었지만 마음은 아직도 어린 시절에 갇혀 힘들어하고 있었다.
나의 마음속 어린아이가 위로를 바라고 있었고 그런 나를 나는 스스로 위로해주기로 했다. 다른 이에게 위로받고 싶었지만 누구에게 받아야 할지 생각나지 않았다. 아니 한 사람 떠올랐지만 그 한 사람을 다시는 만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직접 만날 수는 없지만 나는 엄마의 유해가 잠든 나무에 갔다. 만질 수 있는 것은 비석에 새겨진 이름뿐이었지만 그것을 만지는 순간 그동안 참았던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돌 위에 새겨진 이름을 쓰다듬으며 쭈그려 앉아있었다. 아이들 앞에선 씩씩한 척하려 애쓰고 있었지만 나는 실컷 울고 싶었던 것이다. 그 순간 그곳에서 만큼은 씩씩한 척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울고 싶은 만큼 마음껏 울고 나니 잠깐의 시간이었지만 속이 후련했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떠오르는 생각들을 글로 적어보았다. 그 글에는 어릴 적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도 있고 그때 내가 느꼈던 감정도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리고 나를 괴롭혔던 아이에게도 하고 싶었던 말도 많았다. 그때 상황은 자연스럽게 끝이나 끝났다고 안도했었지만 사실 그때 나는 상처를 제대로 보지 않고 숨기기 바빴다. 겉으론 아무렇지 않은 듯했지만 나의 마음속 아이는 계속 아파오고 있었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다행이었다. 지금이라도 내 어릴 적 상처를 되돌아보며 비틀거리는 나의 마음을 스스로 격려해본다. 그리고 앞으로 이 세상을 살아낼 날이 많은 딸아이가 굳세게 자라날 수 있도록 응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