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64.

by 전영웅

80을 넘긴 노인 셋이 턱시도 정장을 하고 나란히 무대에 섰다. 좌측 끝에 선 노인은 평형감각에 이상이 있는지 잠시 서 있다 옆으로 기울어 쓰러지려 했다. 그 노인을 가운데 선 노인이 얼른 붙잡아 다시 똑바로 서게 도와주었다. 잠시 후, 맘보댄스 음악이 시작되자 노인 셋은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기 시작했다. 방금 전의 평형감각에 이상이 있거나 어기적거리던 80대의 노인이라고는 믿기지 않게 동작은 현란하고 절도 있었다. 물론 박자가 살짝살짝 어긋나기는 했지만, 음악에 반응하는 노인들의 척척 맞는 몸동작은 젊은 사람들도 웬만한 숙련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80을 넘긴 유도 고단자와 젊은 선수들과의 대련 영상을 본 적이 있다. 노년의 유단자는 지팡이를 짚고 대련장으로 천천히 들어왔다. 여러 젊은 유도선수들과 마주 보고 인사를 나눈 뒤 노장은 지팡이를 옆으로 치우고는 두 다리로 자세를 잡았다. 젊은 선수들이 하나씩 나와 그와 대련을 시작했다. 체력과 근력이 젊은 선수와 절대 같을 수 없었다. 그러나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걸어오던 노인의 모습은 전혀 없었다. 노장은 자신을 업어 치려는 선수의 등에 유연하게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자신을 붙잡으려는 선수의 손을 반사적으로 피하고, 다시 업어치기에 걸렸지만 발을 젊은 선수의 다리사이에 걸고 몸은 유연하게 등에 붙여 기술을 허용하지 않았다. 여러 젊은 선수들을 상대로 노장은 단 하나의 기술도 허용하지 않았다. 대련을 마치고 다시 지팡이를 집어 든 노장은 자신과 대련한 젊은 선수들과 인사를 나눈 뒤,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도장 밖으로 걸어나갔다.

두 개의 영상은 각자의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실력자의 모습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랜 세월 꾸준하게 수련하고 노력하면서 몸에 녹아들어 배인 감각을 말하고 있었고, 주어진 환경에서 반응하는 자연스럽고 익숙한 몸의 움직임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오랜 세월을 꾸준하게 수련한다는 것은 몸에 무언가를 새겨 넣는 일임을 깨달을 수 있었고, 나는 검도를 할 때마다 그 영상들을 생각하게 되었다. 연세 지긋하신 고단의 사범님들과 대련을 할 기회가 가끔 있었다. 두 영상을 보고 난 후로는 나와 마주한 노사범 님의 칼을 이전과는 다르게 느끼게 되었다. 칼을 잡는 자세, 검기, 내가 공격할 때마다 자연스레 나오는 상대의 반응들.. 어쩔 수 없이 조금은 느려진 노년의 신체이지만, 오랜 시간의 수련에서 나오는 검기와 자연스레 나오는 칼의 반응은 내가 좀 더 빠르거나 기술이 좋다고 해서 뛰어넘을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몸에 밴 칼은 자연스레 상대를 위압하고 상대의 거의 모든 것을 읽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잘할 수 있는 신체나이는 이미 지나버렸지만, 몸이 알아서 반응하고 움직이며 상대를 제압하는 자연스러움은 인생의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수련하였음을 말없이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같은 호구와 같은 칼을 잡고 흘리는 땀이지만, 각자의 땀의 무게는 분명 달랐다.

무언가를 몸으로 배운다는 것, 수련을 한다는 것은 그랬다. 몸에 새겨 넣는 일이었고, 새김의 깊이와 선명함은 시간에 비례했다. 어릴 적부터 검도를 배워왔고 선수생활을 했던 내 또래들을 뒤늦게 시작한 내가 절대 따라잡을 수 없는 일이다. 꾸준하고 묵묵하게 수련을 해 나가는 사람을 가끔 도장에 나와 칼을 잡아보는 사람이 뛰어넘을 수도 없는 일이다. 따라서 몸의 수련은 가장 정직한 것들 중 하나이다. 기회를 잘 잡아야 하고 눈치가 있어야 하며 재빠르게 반응하고 움직여야 잘 살 수 있다는 현대의 사회에서, 몸의 수련은 가장 아둔하고 느려 터진 과정이기도 하다. 먹고사는 데 있어 그러한 수련이 필요한 일을 선택하지 않음이 옳고 다행인 세상이다. 지식의 축적이 삶을 윤택하게 하고, 기회주의적 행보가 남들보다 좀 더 잘 살게 하는 시대이다. 그렇다면, 몸의 수련은 정말 가치가 없어져 버린 것인가? 오랜 시간을 꾸준하게 단련하는 일은 그저 건강을 위해서만 가치 있는 일인 것일까?

일주일에 두 번은 꼭 도장에 출석한다는 다짐을 가지고 칼을 잡는다. 죽도를 잡고 중단세를 취하고 연격을 하다 보면, 여전히 붕 뜬 듯한 몸의 중심, 아직도 협소한 팔의 휘두름, 불안한 왼발을 느낀다. 몸의 중심에는 힘이 잘 들어가지 않고, 다리는 굳어 도약이 잘 되지 않으니 머리 치기의 공격 가능 거리는 여전히 짧다. 중심은 뜨고 몸은 무거우니 움직임도 굼뜨다. 그것을 만회하려 하니 짧은 거리에서 팔만 좀 빠르다. 뒤늦게 운동을 시작한 몸은 정직했다. 밉지 않게 할 말 다 하는 어느 검우는 내 움직임을 보고, ‘운동 안 해본 티가 나네요.’라고 웃으며 말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나는 꾸준하게 검도를 할 것이다. 몸에 조금씩 검도라는 각인을 새겨 넣고, 꾸준하게 수련하며 ‘나의 칼’이라는 모습을 만들어 갈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저 내 건강을 위해서라고 말한다면 내가 잡는 칼은 별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건강을 위한 운동은 수없이 많고, 내 발목과 무릎은 이미 통증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무엇을 위한 것이고 어떤 쓸모의 가치를 지니는지 모를 지식을 정해진 기간 내에 머리 속에 욱여넣는 교육을 받고서, 우리는 대부분을 잊어버리고 세상을 살아간다. 가장 단순하게 말해서, 시장 좌판에서 고등어를 사는데 중고등학교 때 배운 미적분과 수요공급의 경제법칙을 응용해서 가격을 계산하지는 않는다. 머릿속에서 사장된 지식의 자투리를 잡고 다시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식과 경험을 쌓아야만 한다. 몸의 수련은 시작과 동시에 차분하고 꾸준하게 벽돌 쌓듯 이어나가는 과정이다. 길이 잘못되면 조금씩 수정하는 과정은 있어도, 사장되어버리는 뭉텅이는 발생하지 않는다. 그것이 쌓이면, 지팡이 짚던 노인이 젊은 선수를 상대로 노련함을 보여 줄 수 있다. 연관이 별로 없는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노인의 경험이 의미 없어지고, ‘나이 먹은 꼰대’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나이 듦의 가치를 되찾을 수 있는 삶의 한 방식이 아닐까 생각한다. 꾸준하게 몸에 무언가를 쌓아간다는 것, 그것이 의미를 찾는다면 많이 가벼워진 세상에서 조금씩 중심과 무게를 잡는 좋은 삶의 방식이 아닐까 싶다. 분명하게 연관을 지을 수는 없었지만, 도복을 입고 호구를 쓰며 죽도를 잡을 때마다 수련의 가치를 자주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쌓아가는 수련이 나이가 들어가는 내 몸과 마음을 가볍게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기대도 생겼다. 몸으로 배운다는 것은 그런 가치가 있음을, 분명하지는 않지만 어렴풋이 깨달아가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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