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실에서 환자들을 대하다 보면, 일 때문에 온 몸 곳곳이 아픈 환자들을 많이 만난다. 진료를 마치고 환자에게 ‘일을 쉬는 것도 방법이다’라고 권유하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다. 환자들도 몸이 아플 정도로 혹사당하며 일을 하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다만, ‘먹고사는 일’에의 압박이 그들을 노동으로 내몰기 때문에 일을 그만둘 수 없는 것이다. 어렵게 입을 열어 그렇게 말을 건네면, 환자는 ‘알고는 있다’는 허탈 섞인 작은 웃음을 짓고 진료실 밖으로 나선다. 그쯤 되면, 그들에게 일 또는 노동이란 어떤 의미인가 라는 의문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일 또는 노동의 본질은 대체 무엇인가라는 고민도 같이 시작된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 역시 내가 하는 일에 온전한 의미나 즐거움을 담아내고 있지 못하기에, ‘일을 쉬는 것도 방법’이라는 나의 말에 보이는 환자들의 허탈한 웃음을 충분히 이해한다. 그렇다면, 환자들과 나의 노동에는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일까?
자본주의 경제 원리를 아주 단순하게 설명하자면, 생산과 소비의 순환이라고 말할 수 있다. 생산은 노동이다. 소비는 노동 이외의 영역, 즉 노동 이외의 시간에 이루어진다. 말하자면 인간은 노동을 하고, 노동을 하고 난 다음에는 소비활동을 한다. 자본주의 원리상 인간의 노동은 소비를 위해 이루어진다. 현대사회는 이 원리가 아주 적확하게 들어맞는다. 그리고 인간에겐 공허한 마음이 늘고 쌓인다. 현대의 사회경제적 원리가 복잡한 인간의 마음 구조와 충돌하면서 발생하는 현상이다. 우리는 노동을 하고 소비를 하지만, 소비를 위해 노동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쯤은 누구나 알고 있다. 인간에게 노동의 가치란 그만큼 자본주의적이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대사회의 시스템은 이런 부작용을 덮어 가리거나,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기 위해 이런 요구를 내세운다. ‘노동을 통해 자아를 찾고 개인의 가치를 올려라!’.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나치 수용소의 표어는 비단 유대인들을 조롱하는 의미만 가지고 있지 않다. 현대사회에서의 노동은 소비를 통한 자유를 강조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노동으로 돈이 쌓이면 소비를 통해 삶의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진정한 노동의 목적이나 노동가치의 활용이 아니다. 그 사실을 그들도 잘 안다. 노동의 가치는 내면의 만족에 있다는 사실을 모르거나, 알고 있어도 만족을 찾을 수 없기에 무의식의 스트레스를 소비에 풀어낼 뿐이다. 노동의 가치나 결과물이 내면을 만족스럽게 채우고, 그것이 다시 노동에 활용되며 자가 순환이나 단순교환에 활용되던 시대는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다. 노동의 가치는 자본화되고 결과물은 돈이 되는 시대에, 노동의 의미도 달라졌다. 삶과 직결되는 노동행위의 가치는 상대적으로 낮아지고, 단순히 키보드만을 두드려 시세차익의 순간을 노리는 행위가 더 존중받게 되었다. 웬만한 노동가치로는 내 한 몸 누워 편하게 쉴 수 있는 집 한 채나 땅 한 줌 장만하기도 어려워졌다. 이 모든 것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그래도 노동을 해야만 하는 사람들의 마음엔 공허함만 늘어났다. 분명한 것은 단순한 소비만으로 먹고 입는 삶의 가장 단순한 조건들이 충분히 이루어지는 세상이다. 그러나, 인간의 만족감과 충만감을 노동은 절대 채워주지 못한다.
노동이 인간에게 가치나 의미를 만들어 주지 못한다면, 노동은 최소필요 수준으로 축소되거나, 노동의 진정한 의미를 찾는 노력이 필요하다. 후자의 방법은 책에서 소개되고 있다. 아니, 노동의 진정한 의미라기보다는 노동의 결과물을 가지고 자아의 의미를 찾고, 좀 더 즐겁고 다채로운 삶을 만드는 방법을 소개한다. 노동을 해야만 하는 인간에게나 또는 자아를 찾는 일에 노동 자체가 배제되는 건 딜레마이다. 사실, 자본주의 사회를 벗어나는 것이 노동의 온전한 의미를 찾는 가장 확실한 방법인데, 그럴 수 없다는 것 역시 현실 안의 진실이다. 노동이 인간의 자아를 외면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을 축소해도 인간의 보편적 삶이 크게 위협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 역시 진실이다. 부의 축적이 이미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분배를 통한 노동의 축소가 인간의 공허를 덜어낼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것이 인간을 좀 더 놀이에 가까운 노동을 추구하게 하고, 예술을 좀 더 인간의 노동에 가깝게 만들 것이다. 삶의 여유를 되찾은 인간이 축소된 노동의 결과물을 통해 즉흥과 실수를 겪어가며 시간을 좀 더 다채롭고 깊게 꾸며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다양한 노동의 다양한 모습 그대로 가치를 존중받는다는 일은 중요하면서도 어렵다. 가치의 획일화가 당연시되는 세상에서는 더욱 그렇다. 복잡한 이성을 가진 인간이 가치의 획일화 안에서 몸과 마음을 움직일 여지는 매우 협소하다. 따라서, 대안은 언제나 전복적이다. 노동이 우리를 공허하게 만든다고 해서 우리는 일을 그만둘 수 있을까? 적어도 지금의 한국사회에서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노동의 공허함에서 벗어나 자아의 가치를 찾겠다는 수많은 소소한 대안들이 자칫 위험할 수 있는 이유는, 개인을 현실 영역 바깥에 존재하는 난민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노동과 자아에 대한 문제제기에는 적극 동의하면서도, 문제를 극복하는 방법에 있어 아쉬움이 매우 컸다. 구조의 문제보다 개인의 노력과 심리적 환기 수준의 해결책에 머물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제시하는 해결책에 동의할 수 있는 사람들도 어찌 보면 특정 계급 안에 수렴되는 현실이 존재한다. 개개인의 고민을 유도하고 모으는 마중물의 역할로 이 책은 충분할 수 있으나, 마중물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들은 현실 안에서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을 이 책은 간과하고 있는 듯 해 아쉬움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