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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영웅 Sep 28. 2018

[독후감] 페미니스트 크리틱, 더 나은 논쟁을 할 권리


 지금과는 다른 세상, 그러니까 지금보다는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일은 언제나 지속되어 왔다.  문제는 꿈으로만 허용되었을 뿐, 실천하는 일은 매우 어렵거나 강하게 차단당해 왔다는 데에 있다.  구체제가 거머쥔 사상과 권력은 너무도 공고해서, 권력에 저항하는 변화를 쉽게 허용하지 않았다.  변화는 아주 힘겹게 또는 우연히 다가왔다.  그것이 역사였다.  현재의 역사 역시 다르지 않다.  남성 우월주의와 가부장 사상에 저항하는 페미니즘은 현재의 역사 안에서 끈질기고 버겁게 움직이고 있다.  

  강남역 사건은 한국사회에서 여성의 상황을 적나라하게 증명해 내었다.  희생자와 동일시하는 여성들의 움직임은, 이제까지의 그리고 현재에도 이어지는 여성의 사회적 위치와 심리적 불안을 조금이나마 깨닫게 했다.  페미니즘의 문제들은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지만, 누군가가 희생되고 나서야 문제제기에 가속도가 붙어버렸다.  현실 속 거리에서는 일종의 전쟁이 벌어졌다.  경제적으로 암울한 현실을 등에 얹은 남성 우월적 보수성이 암울한 사회경제적 현실에서 벗어나려는 여성들의 저항과 부딪히며 서로의 날에서는 불똥이 튀었다.  팽팽한 신경전은 결국 극단을 낳았고, 남성적 보수성도 여성적 저항도 각자가 존중되거나 이해되지 않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드러내었다.  3자적 시선으로 볼 때, 서로에게나 사회적으로나 전혀 도움이나 발전이 없는 형국의 전장이었다.

  페미니즘은 남성 전복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지금보다는 더 나은 세상을 꿈꾸고 실현시키는 노력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능한 논쟁이 이루어져야 하고, 논쟁을 통해 더 나은 논쟁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논쟁의 바탕은 현실의 직시와 구조의 이해에서 비롯된다.  현상은 그 지점에서부터 파생되어 나오는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한국사회에서의 여성이 서 있는 현실의 구조와 인식이라는 바탕을 직시해보면, 근본을 알 수 없는 가부장성이라는 요소를 발견하게 된다.  가부장성은 남성우월주의와 거의 비슷한 의미임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페미니즘이 주장하고 제기하는 거의 모든 문제가 여기서 시작됨은 당연한 일이다.

  젠더 권력의 견고함은 여성으로 하여금 남성에게 굴복하게 만드는 사회적 장치로 발전한다.  동일한 일을 해도 남성과 여성의 급여는 차이가 발생한다.  사회적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십 대 여성이 생존을 위해 성매매에 뛰어들었다가도, 수렁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은 철저한 피해자 코스프레를 통한 약자의 모습을 취하는 것이다.  초이스를 받아야만 악순환적 부채구조에서 탈출할 수 있는 룸살롱 여성이 성형을 하고 화장을 하며 명품으로 치장하는 이유는 본인의 의지와는 별개이다.  저출산 사회가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은 출산 기계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여성으로서 또는 가정을 이룬 사회 구성원으로서 어떻게 하면 자유롭게 출산하고 편안하게 양육할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는다.  출산하지 않는 가임기 여성들에 대한 무의식적 비난을 퍼뜨리는 데 골몰한다.  이주민 여성들은 한국사회의 가장 아래 계급이라는 밑돌이 되고 있다.  이런 상황들은 발전하고 있다는 한국사회에서 역으로 점점 더 먹고살기 팍팍해지고 있는 평범한 계층이 받는 심리적 압박에 더 심화되고 있다.  온전하게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82년생 김지영’의 이야기는 현시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중산층’ 여성의 가장 적나라하면서도 보편적인 모습이었다.  

  나는 페미니즘을 큰 틀에서 존중하고 지지한다.  지금까지 발전해 온 세상은 굳이 남성 여성을 가려가면서 본능과 완력의 차이 때문에 차별받을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큰 틀 안에 존재하는 작은 틀들의 모습은 종종 나를 의문에 빠뜨리곤 한다.  남성과 여성의 행위와 표현은 서로의 관심을 끌기 위한 본능을 어쩔 수 없이 담고 있는데, 그것의 어디까지가 성적 혐오와 관음을 넘지 않는 선일까 궁금하다.  길거리를 다니는 여성의 외모와 옷차림, 방송에서 보여주는 젊은 여성들의 예쁜 미모와 관능적 몸짓은 어디까지가 성적 호기심이나 혐오나 관음을 넘지 않는 주체적 표현일지 궁금하다.  매스컴이 강요하는 이 시대의 미의 기준, 그것의 인위성과 성형까지도 요구하는 폭력성에는 어째서 비판적이지 못하고 관대해 보이기까지 하는지 궁금하다.  페미니즘의 방향성은 존중하지만, 진영 내의 구성원들을 이끄는 힘은 어째서 허약한지 역시 의문이다.  생각보다 많은 여성들이 가부장의 사회에서 편안함을 느끼고, 사회 구조 안에서 직업활동을 하면서도 별다른 비판의식 없이 아이를 낳아 키우며 그것이 당연한 인간의 삶이라 자위한다.  페미니즘은 어째서 그런 대다수의 여성들을 끌어모을 수 없는 것일까?  남성 우월주의에 기대어 스스로의 보수성을 아무렇지 않게 드러내는 여성 지식인이나 이전 세대를 살아온 노년의 여성들은 일단 차치하고서 생각해보더라도, 페미니즘 진영은 쉽게 뭉쳐지지 않는 치명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논쟁은 끊임없이 이루어져야 한다.  논점을 벗어난 혐오를 극복하고, 페미니즘 운동이 지닌 현실과 이상의 한계를 뛰어넘어, 말 그대로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을 바라보아야 한다.  좀 더 나은 세상을 이야기하는 것은 페미니즘의 문제만이 아닌 세상 모든 것들의 문제에 대한 의무이다.  진영의 경계를 분명히 하는 것이 아니라, 경계를 허물고 나아가 좀 더 사람이 살 만한 세상을 만들어야 하는 현시대의 숙제이다.  그것은 결국 여성의 문제만이 아니다.  좀 더 나은 세상은 여성만이 아닌 남성과 사회 모든 구성원의 행복을 추구하는 그런 세상일 것이기 때문이다.  세세한 비판은 존재할 수 있어도 페미니즘에 근거 없는 혐오나 감정적 비난을 던져서는 안 되는 가장 큰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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