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72.

by 전영웅

시작은 동료였던 내과 선생이 선물이라며 건넨 건프라 키트였다. 그것은 프라모델과 연관된 내 과거를 순식간에 몰아 소환하더니, 머리와 가슴을 거칠게 휘저어 버린 뒤 차분히 가라앉았다. 어릴 적 프라모델은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조급함을 참지 못하고 길거리에 주저앉아 만드는 장난감이었다. 방학의 마지막 날, 엄마의 호된 꾸중과 함께 로봇 하나 다급하게 만들어 학교에 냈던 만들기 숙제였다. 3년의 고등학교 기숙사 생활에서 내 캐비닛 한편에 가만히 서 있던 백식 건담의 추억이었다. 그리고, 제주에서의 생활이 온갖 호기심으로 채워질 때 가슴 한편에 비집고 들어온 내 취미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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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과 선생은 한 번 만들어보라며 키트만 건넨 것이 아니었다. 어떤 키트가 만드는 재미가 있고, 어떤 키트는 만들어놓으면 멋있을 거라는 조언도 종종 건넸다. 런너에서 게이트 처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니퍼는 무엇이 좋은지 그의 조언은 그대로 나의 건프라 취미의 시작이 되었다. 퇴근을 하고 아내가 차려준 저녁을 먹고 나서 특별히 할 일이 없는 날에는 음악이나 라디오를 틀어놓고 건프라 제작을 하기 시작했다. 일주일에 하루 이틀 정도, 가벼운 마음으로 런너에서 부품들을 분리해 내 설명서대로 조립하는 일은 소소한 재미이자 시간을 자연스레 흘려보내는 좋은 방법이었다.

내과 선생이 건네 준 키트를 만들고 난 후 내가 직접 주문해서 만든 키트는 사자비 MG, verKa. 였다. 생각해보면 건프라 초보가 선택하기엔 조금 무모한 키트였다. 그 웅장하고 덩치 좋은 키트를 도색 작업은커녕 게이트 처리 기술도 제대로 익히지 않고 가조립(도색작업 없이 부품만 끼워 조립하는 것을 의미)으로만 만들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반다이사의 마스터 그레이드(MG) 중, 카토키 버전(ver Ka.)의 데칼은 습식 데칼이라 물에 접착면을 녹인 뒤 지정된 곳에 붙여 말리는 형식이다. 어느 정도 정교함을 요하는 작업인데, 나는 데칼작업지를 한 번에 물에 넣었다가 데칼들이 동시에 사방으로 흩어지는 대참사를 일으켰다. 덕분에, 키트의 조립은 대략 마무리했지만, 데칼 작업과 다듬기, 디테일 작업에서는 매우 아쉬움이 남는 키트가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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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가조립으로 완성한 키트가 하나 둘 쌓이기 시작했다. 그다음은 역시 무모하게도 뉴건담 MG, verKa. 였고, 쥬악그 HG, 톨기스 III MG, 건담 ver. 2.0 MG와 시난쥬 티타늄 피니쉬 MG를 제작했다. 가조립이지만 일주일에 두 세 시간 정도를 들여가며 만드는 작업이어서 키트 하나 당 작업 기간은 꽤 길었다. 작업을 하면서 니퍼도 점점 좋은 것으로 바꾸었고, 아트나이프, 데칼용 가위와 핀셋, 그리고 먹선용 펜 등등의 보조기구들이 하나 둘 늘기 시작했다. 런너에서 부품을 분리해내고, 게이트 처리에 나름 신경을 쓰게 되었다. 부품의 접합부나 홈에 명암을 주기 위해 먹선 펜도 사용하게 되었다. 키트 하나 만드는 데, 무언가가 하나하나 쌓이기 시작했다. 쌓일수록 키트의 완성도와 존재감도 커졌는데, 그럴수록 무언가가 조금씩 아쉬워지기 시작했다. 도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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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색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우선은 에어브러시와 컴프레셔가 있어야 도색의 완성도를 높일 수 있었고, 브러싱 기법도 나름 공부해야 하는 영역이었다. 그 이전에 간단하게는 붓 도색이 있긴 한데, 붓 도색은 농도나 붓질 방향에 따라 브러시의 흔적이 남아 오히려 지저분해질 수 있었다. 고민 끝에 프레임부터 붓 도색으로 시도해보기로 했다. 건프라는 구성의 안팎으로 구분하자면 내측의 프레임과 외측으로 갑으로 나눌 수 있다. 즉, 뼈대이자 가동 구조의 거의 전부인 프레임은 갑에 의해 가려진다. 프레임이 노출되는 부분은 주로 관절부에서 조금씩 노출되는데, 그 부분을 붓 도색하여 노출 프레임을 조금 강렬하게 보이게 하려는 의도였다. 선택한 색상은 티타늄 실버와 건 메탈이었고, 대상 키트는 뉴건담 MG, verKa. 였다. 건프라에 관심을 가진 것을 안 지인이 선물로 준 것이었다. 한 번 만들어 본 키트이니 노출 부분이 어딘지는 거의 알 수 있었다. 노출 부위로만 브러싱의 흔적을 최소화하면서 도색을 했다. 프레임 도색만 한 것이 아니라 가볍게 강조할 수 있는 갑 부분에도 조금씩 붓 도색을 진행했다. 예를 들어 핀 판넬의 전자기장 발산 구멍이나 백팩의 버니어는 티타늄 실버로 도색하는 식으로 말이다. 이후에 같은 방법으로 프레임 도색을 작업한 키트는 백식 건담 MG와 시난주 스타인 MG 모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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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색을 시작하니 욕심이 다시 차올랐다. 육지로 직장을 옮긴 내과 선생은 멀리서 나를 유혹했다. 에어브러시까지 해서 컴프레서와 후드를 저렴한 값에 넘기겠다고 했다. 에어브러시는 덤이라는 말에 나는 고민을 크게 하지 않았고, 결국 그가 사용하던 에어브러싱 세트를 넘겨받아 집 작업실에 설치했다. 그리고, 프라모델 작업장도 설치해서 겉보기엔 완벽한 건프라 작업실을 완성했다.

본격적인 도색작업의 시작은 엉망이었다. 서페이서를 에나멜 신너에 섞는 어처구니없는 실수부터 시작해서, 건담 ver. 3.0 MG 모델의 컬러차트를 보고 고른 색상들은 죄다 에나멜 도료였다. 따라서 나의 에어브러싱 첫 작업은 우왕좌왕 속에서 엉망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렇다고 도색이 아주 망한 것은 아니었다. 고르게 착색된 갑의 표면은 나름 만족스럽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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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나름 안정이 되어서 서페이서는 락카 신너에 2:1 비율로 섞어 사용 중이고, 도료들 역시 락카 도료들을 키트마다의 컬러 차트를 참고해서 구입해 모으고 있다. 게이트 처리는 니퍼로 자른 뒤 아트나이프로 나름 조심해서 다듬어내지만 여전히 어설프고 결과가 맘에 들지 않는다. 갑의 사포질은 800번으로 처리한 뒤에, 1200번 서페이서를 도포해서 질감을 표현한다. 그 위에 2:1 또는 3:1로 희석한 도료를 에어브러시로 분사해서 고르게 착색시킨다. 색상은 키트마다의 컬러차트를 참고해서 거의 정확한 비율로 조색하여 플라스틱 튜브에 미리 만들어 사용한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욕심을 내는 건 프레임 도색인데, 개인적으로는 건 메탈 색상을 좋아해서 건 메탈 100%나 건 메탈 75%에 메탈 그린 25%를 섞어 두 가지 배색으로 프레임을 표현한다. 관절부 실린더나 버니어 부위는 실버 계열의 색상을 좋아한다. 이런 부위들은 나름 욕심이 나서, 프레임 색상 조합용으로 다크 아이언이나 메탈릭 그레이, 스틸 계열의 도료를 모으는 중이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안정된 도색작업으로 완성을 한 키트는 스트라이크 건담 PG와 RX-78 GP01/Fb, PG, 그리고 GP03 Stamen, HG이다. 특히 PG 키트들은 각각 꽤 오랜 시간에 걸쳐 천천히 만들어 작업 과정에 대한 애착도 생기는 키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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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에 하루 이틀, 하루에 두세 시간 정도를 작업실에서 건프라 작업을 한다. 라디오를 틀어놓고, 후드와 컴프레서를 작동시킨 다음 필터 마스크를 착용하고 작업을 시작한다. 여름에는 에어컨을 틀고, 겨울에는 히터를 틀어야 한다. 그래야 도색이 습도나 온도에 영향을 덜 받는다. 작업을 하는 시간은 무척 빨리 지나간다. 작업이라지만 한 번의 시간 투자가 적으니 작업 과정은 더디다. 스트라이크 건담 PG가 6개월, GP01/Fb PG가 8개월 반 정도 걸렸다. 덴드로비움 HGUC 중고는 stamen만 도색까지 완성하고는 orchis는 도색에 상당한 부담을 느껴 가조립으로 마쳤다. 앞으로 제대로 완성을 해 보고 싶은 키트가 사자비 MG와 덴드로비움 HGUC이다. 쌓여있는 키트도 해결해야 하지만, 도색을 하고 나니 정말 시도해보고 싶은 키트들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키트마다의 컬러차트 대로 정직하게 색을 만들어 도색하는 수준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나 스스로 개성 있는 색을 만들어 도색을 해 볼 수 있을까? 건프라만으로도 덕질의 깊이는 무한함을 느낀다. 다시 새로운 키트의 작업을 시작했다. 더블 제타 건담 MG verKa.이다. 천천히 시간을 투자하며 언제 끝날지 모를 작업에 들어 선 것이다. 나는 건프라 작업을 하면서 제작과 도색의 세계에 몰입하기 시작했고, 천천히 흐르는 시간을 즐길 줄 알게 되었다. 아직 이 취미의 끝은 나 스스로도 짐작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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