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는 갑상선 수술을 받았다. 제주에 입도하던 그 해 가을에, 아내는 서울 집 근처의 갑상선 전문병원에서 갑상선의 우측 반을 떼어냈다. 수술을 받고 이틀 정도가 지난 주말, 진료를 마치자마자 비행기를 타고 아내를 보러 서울로 올라갔다. 조금 어둡고 탁한 분위기의 2인실 병실 한 자리에, 아내는 앉아서 나를 맞았다. 침대 아래 보호자 침대에 장모님이 앉아계시다 나를 보고 일어나셨다. 장인어른은 4살인 아들의 손을 붙잡고 복도를 다니다 돌아오셨다. 아내의 목소리는 완벽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목 한쪽으로 수류탄같은 실리콘 드레인백을 연결한 채, 많이 괜찮아졌다는 표정으로 방금 병실로 들어온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모든 풍경이 내 마음을 거칠게 휘저어버렸다. 화가 난다거나 미안하고 죄송하다거나 다행이라거나, 그런 감정들은 아니었다. 스스로를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내몰릴 수 밖에 없었던 그간의 경과들과 지금 내 눈앞의 모습들에, 톱니바퀴의 엇갈림처럼 불편하고 반갑지 않은 기분이 나를 엄습했다. 그 기분을 드러내지 않으려, 나는 애써 무표정해야 했다.
시작은 친구의 개원을 축하해주러 간 자리였다. 검사실에 초음파장비가 있길래, 시험삼아 아내의 목에 대어 본 영상에 갑상선의 혹이 보였다. 크기가 1센티미터를 넘고 있었다. 크기가 크다고 해서 다 악성은 아니라서 시간을 두고 경과관찰을 해 보았다. 6개월마다 병원에 보내 검사를 시행했는데, 크기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때마다 세침흡인 검사를 시행한 결과에서는 다행히 악성 종양은 아니라고 했다. 그렇지만, 고민해야 했다. 이 혹을 그냥 두고 관찰만 할 것인가, 아니면 절제를 하는 것이 옳을까. 지금은 악성 종양이 아니더라도 1센티미터 이상의 크기가 점점 증가하는 혹에 대해서는 수술을 권유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에는 가이드라인이 모호해서 판단하기가 무척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고민 끝에 수술을 진행하기로 했다. 크기가 더 커지면서 불안과 고민도 같이 커지느니, 당장 해결을 하자는 생각에서였다.
갑상선의 수술영역은 외과의사의 몫이었다. 그리고 나는 외과의사였다. 세부전문으로 갑상선을 다루지는 않았지만, 전공의 생활을 하면서 숱하게 보고 겪어 온 것이 갑상선이었다. 따라서 갑상선에 관련하여 판단의 순간에서는 냉정함을 유지해야 하는데, 판단의 대상이 가족이 되니 나는 냉정함을 유지하기가 무척 어렵고 힘들었다. 나를 바라보는 아내와 어른들의 표정은, 너 하나의 판단으로 모든 것이 결정된다는 부담을 주기에 충분했다. 수술의 결정에서부터 어느 병원에서 수술을 할 것인가까지, 내 판단이 중요했다. 확실한 것 하나는 내가 아내를 수술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중이 제 머리를 깎지 못하듯, 나는 내 아내의 몸에 직접 칼을 댈 수 없었다. 숱하게 수술에 참여해서 경험을 쌓았지만, 그래서 수술의 시작부터 끝까지 손이 기억할 정도였지만, 나는 내 가족의 몸에 칼을 대는 일에 자신이 없었다. ‘외과의사 남편의 판단’은 나를 짓누르고 있었고, 나의 역할임에도 역할에 자신없어하는 스스로가 비루해질 뿐이었다.
‘외과의사 보호자’라는 딱지 역시 모든 것을 어렵게 만들었다. 수술을 결정하고 나서, 검사를 진행했던 갑상선 전문병원에 찾아가 수술적 치료를 상의하러 만난 주치의는 아내 옆의 나를 보고는 상당히 부담스러워했다. 나 역시 입장을 바꾸어보면 이해 못할 상황은 아니기에 최대한 의견을 존중하고 경청했지만, 주치의는 끝까지 부담감을 떨치지 못했다. 주치의의 부담은 불안이 되어 나와 아내에게 전이되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제주에 내려와 수술을 진행할 병원을 다시 고민했다. 병변의 상태를 포함한 모든 상황이 수술을 어렵게 하지는 않고 있어서, 집에서 가까운 병원에서 수술을 받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래서, 제주에서 수술을 진행하자 결정하고 지역 외과의사회 모임을 통해 알게 된 갑상선 전문 외과 선생님께 전화 문의를 드렸다. 그러나, ‘외과의사 보호자’라는 딱지는 어김없이 작용했다. 전화상으로 대략의 경과를 설명하자마자 상대방은 대뜸 나에게 되물었다. ‘선생님, 정말로 수술을 여기서 하시려는 겁니까?’
난감해졌다. 모든 것은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갔다. 시선은 어쩔 수 없이 연고가 있는 서울로 다시 향했고, 검사를 받았던 병원에서 주치의를 바꾸어 수술상담을 받기로 했다. 이번에는 아내만 보냈다. 내가 옆에 있는 것이,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다행히 이번 주치의는 모든 상황을 파악하고서도 자신감을 보였고, 아내는 그런 모습에서 신뢰를 받았다. 상담과 수술날짜 예약을 마치고 전화로 상황설명을 듣는데, 다행이라는 기분과 미안함과 어정쩡함이 뒤섞였다. 내릴 자리없이 공중에서 애매하게 부유하는 기분이었다. 이 상황에서 외과의사라는 나의 직함은, 굵고 진하게 새겨진 주홍글씨였다.
일부러 주치의와 대면도 통화도 하지 않았다. 아내 혼자 올려보내 옆자리를 장인과 장모님께 부탁했다. 나는 제주에서 아무렇지 않은 모습으로 일상을 이어나갔다. 걸어서 출근을 했고, 평소와 다름없이 회진을 하고 외래 환자를 보았다. 아내는 오후 이른 시간에 수술이 예정되어 있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시간들이었지만, 모든 것이 무겁고 느렸다. 생각은 녹슨 톱니바퀴 축처럼 삐긋거리고 잡음을 내고 더뎠다. 다행히 외래 환자가 많지 않았다. 아내의 수술시간에 다다라서 나를 찾아온 환자에게 무어라고 열심히 설명을 했는데, 머리가 멍해지면서 설명을 제대로 한 건가 싶었다. 아내는 수술을 시작했다. 수술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를 찾아온 환자는 초음파 검사결과 갑상선에 혹이 관찰되고 있었다. 나는 환자를 초음파실로 데려가 세침흡인검사를 했다. 아내는 저 멀리 병원의 수술실에 누워 갑상선 수술을 받고 있었고, 그 시간 나는 누군가의 갑상선에 보이는 혹에 초음파를 대고 주사바늘을 찔러 검사를 하고 있었다. 만감이 교차했다.
더딘 시간은 그래도 꾸역꾸역 흘렀고, 장인어른에게서 전화가 왔다. ‘수술 잘 되었다고 하네, 걱정하지 말게나.’. 전화를 내려놓는데 손과 어깨에서 힘이 풀렸다. 내가 무의식적으로 몸에 힘을 주고 긴장하고 있었구나.. 그래도, 마음은 개운치가 않아 잠시 바깥으로 나갔다. 마침 바깥으로 잠시 나온 동료의사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나도 하나 달라고 했다. 끊은지 수 년이 지나 이제는 생각도 나지 않는 담배였다.
시간이 흐르고 아내는 나에게 서운했다고 말했다. 주말에 자기를 보러 병원에 왔으면 계속 옆에 있었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물었다. 맞는 말이었다. 그러나, 나는 피곤할텐데 들어가 쉬라는 장모님의 말씀에 이른 저녁, 아이와 함께 서울 집으로 들어갔다. 정체를 분명히 하지 못하는 그 어색하고 불편한 기분에서 어서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외과의사 보호자라는 딱지는 현실로도 나타나서, 아내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고 있었다. 갑상선 수술 후 발생할 수 있는 성대마비가 생긴 것이었다. 모든게 나 때문인 것 같았고, 너무 답답해서 주치의에게 전화를 걸어 성대마비가 생겼다는 불만을 터뜨렸다. 그러나 상황을 너무도 잘 이해할 수 밖에 없는 같은 외과의사끼리 불만에 힘이 실리지도 않았고, 대답에도 민망함만 묻어 있을 뿐이었다.
수술 후 조직검사 결과는 매우 긍정적이었다. 우려했던 혹은 2센티미터가 넘는 큰 혹이었지만 악성은 아니었는데, 검사 중 우연히 발견된 옆의 2밀리미터로 작게 자리한 혹이 악성으로 판명된 것이었다. 아내의 목소리도 시간이 지나며 회복되었고, 가장 작은 용량의 갑상선 호르몬제를 복용하는 일 말고는 모든 것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러나, 중이 제머리 못 깎는 일은 나에겐 작은 상처로 남았고, 평생의 작은 부담으로 작용할 것임을 절실히 깨닫는 경험이었다. 무언가를 안다는 것은 때로는 스스로를 조여매는 일이었다. 나는 그 한계 안에서 철저하게 속박당했고, 그것으로 내 주변을 힘겹게 만들었다. 주홍글씨의 위력은 유독 나에게만 혹독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이제는 외과의사에서 일반의로 역할을 바꾸었지만, 잘 지워지지 않는 낙인은 다시 가까운 내 주변을 힘들게 만들까 여전히 두렵고 버거운 구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