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국가 건강검진을 받은 환자가 검진 결과지를 들고 진료실로 들어왔다. 중년기를 지나 노년에 접어드는 여자 환자의 얼굴은 무척 긴장되어 있었다. 결과를 설명 들으러 왔다는 말 외에는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나는 건네받은 검진 결과지를 천천히 들여다보았다. 병원에 기록된 환자의 검사자료들을 다시 한번 결과지와 대조해보면서 수치와 문자로 기록된 환자의 상태를 확인했다. 환자의 상태는 전반적으로 나쁘지 않았다. ‘정상 B’라는 최종 판정 문자가 조금 매정했지만, 환자의 건강상태는 좋았다. 다만 한 가지, 유방촬영 결과 판정 표기란에 ‘판정 유보’라고 네 글자가 인쇄되어 있었다. 판독 결과와 영상자료를 살펴보니 비대칭 유방 소견이 있었다. 사실 나는 결과지를 들고 살펴보자마자 환자의 표정이 굳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비대칭 유방’이라는 다섯 글자와 ‘판정 유보’라는 네 글자가 자신을 무겁게 짓누르는 느낌.. 마치 내 몸에 이상이 생겼으니 어서 의사를 찾아가라 종용하는 듯한 무미건조한 글자들의 협박.. 마음에는 커다란 돌덩이 하나가 얹혀 일상의 모든 감각들을 마비시켰을 것이다. 자주 만나게 되는 케이스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바로 설명을 해 주었다.
“유방촬영 결과 때문에 설명 들으러 오신 거죠? 이건 방사선 촬영으로는 잘 보이지 않으니까 유방초음파를 받으라는 뜻입니다. 무슨 문제가 생겼다는 의미는 아니니까 긴장하지 마셔요.”
환자는 그제야 굳게 다문 입을 열고 안도의 숨을 내쉰다. “전 제 몸에 무슨 문제가 생긴 줄 알고 놀래었잖아요.”
나는 천천히 환자의 이력을 물어본다. 출산력과 유방초음파를 받았던 과거력이 있는지를 확인한다. 최근 2-3년 내 유방초음파를 받았었다면 여유를 가지고 다시 받아보기를 권유하고, 유방초음파를 받은 적이 없다고 하면 며칠 내에 받아보기를 권유하면서, 특별한 문제가 없어도 2-3년마다 정기적으로 받아보기를 권유한다. 남자 의사인 내가 부담스럽다면 다른 병원에서 꼭 받기를 권유한다. 설명을 듣고 진료실을 나서는 환자의 발걸음과 몸이 한결 가벼워 보였다. 그리고, 설명을 듣고 바로 유방초음파를 받은 환자의 표정은 후련함 그 자체였다.
진료실에 앉아 마주하는 환자에게서 느끼는 건 공포와 불안이다. 내가 해야 할 일은, 내 능력이 닿는 한 환자에게서 불안과 공포를 걷어내는 일이다. 내가 가진 지식과 경험으로 불안과 공포를 걷어내는 일은 일상이 되었다. 외과의사였던 이전에는 나의 지식과 경험은 환자의 몸에 생긴 문제를 직접적으로 해결하는 치료법에 활용되었다. 의원급에서 일반진료를 담당하고 있는 현재의 나는 내가 가진 것으로 주로 환자의 불안과 공포를 걷어내는 데 활용되고 있다. 사람의 몸에 연관된 세상의 불안과 공포는 참 많고 거대해서, 열심히 걷어내고 걷어내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고통스러운 수술을 받고 힘들어하다가도, 회복이 되어 밝은 표정으로 퇴원하는 환자들에게 더 이상의 불안이나 공포는 없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지금은, 환자들 스스로 끊임없이 만들어내거나 어디선가 짊어지고 온 그것들을 거두어도 끝이 없는 기분이다.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부풀어 오르는 불안과 공포 앞에서 작은 칼과 방패를 들고 혈혈단신으로 맞서는 기분마저 들 때가 있다.
나는 아침방송을 싫어한다. 출근하자마자 대기실 텔레비전에서는 아침부터 소리 지르고 싸우는 드라마 소리가 들려온다. 시간이 좀 지나면 밝고 화사한 표정의 진행자들과 의료인들이 서로 건강문제를 두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호들갑스럽게 나눈다. 말 한마디 한 마디가 끝날 때마다 청중들의 ‘아~’ 반응하는 소리가 들리고, 그 모습을 대기실에서 진료를 기다리는 환자들이 집중해서 보고 있다. 따지고 보면 사람들에게 불안과 공포를 심어주는 근원 중 하나는 이런 아침방송 정보 프로그램들이다. 이 프로그램들은 정확한 정보라는 가면을 꼭 맞게 쓴 채, 아무렇지 않은 모습으로 자연스레 시청자들에게 불안과 공포를 심는다. 환자들이 나를 마주하고 찾아온 이유를 말할 때, 두 번째 문장의 첫 단락은 주로 ‘티브이에서 보니까’로 시작한다. 아침의 피곤함이 아직 남는 시간에 방송 화장을 하고 깔끔하게 차려입은 의료인들과 진행자가 나누는 이야기들 정보들은 대부분 사실이고 정확하다. 그러면서, 그들은 교묘하게 ‘그러니까 이 방송을 보고 있는 당신들도 안심하지 말라!’라는 불안을 이식한다. 이식된 불안은 그대로 내 앞으로 다가와 마주한다. 나는 칼을 꺼내고, 환자에 이식된 불안을 잘라낸다. 환자는 불안 이전의 상태가 되어 한결 가벼워진 모습으로 다시 돌아간다. 나는 이 과정을 무한에 가깝게 반복한다. 반복되는 이 과정은 아마도 의료산업이라는 포장 아래, 이 나라의 의료자본을 부풀리는 주요한 기전의 하나일 것이다.
가끔씩 내 앞에 놓인 의학용어들이나 연관 단어들을 의료인이 아닌 입장에서 마주해본다. 그것들은 의사인 나는 많이 무뎌져서 아무렇지 않은 글자들이지만, 의료인이 아닌 입장에서 마주해보면 글자들은 매우 건조하고 무뚝뚝하게 다가왔다. 친절하지 않은 모습으로 검게 인쇄된 활자를 바라보는 환자의 입장에서 보면, ‘정상’이라는 글자마저도 ‘안심하지 말라!’라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다. 자신의 가슴을 아프도록 내리눌러 찍은 결과에 ‘판정 유보’라는 무미건조한 글자가 인쇄되었다. 그 무뚝뚝함에 환자의 불안은 얼마나 증폭되었을까.. 의료는 언제부터 결과에 상관없이 인간으로 하여금 막연한 불안을 느끼게 하는 대상이 되어버렸을까.. 의료를 통해 국가의 관리대상이 되어버린 인간은 인격이 아닌 관리 개체가 되었고, 이는 A4용지에 무미건조한 몇 글자로 굵게 인쇄된 ‘상태 확인 결과서’로 증명된다. 관리 개체가 아닌 인격적 인간은 그것에 불안을 느끼고, 나는 그들을 마주하며 괜찮다는 설명으로 관리 개체에서 아직은 불안에 빠질 필요가 없는 인격적 인간으로 회복시켜준다. 국가가 관리하는 의료는 자체로 불안의 근원이 되어버렸다.
그렇다면 나는 언제나 환자에게 안심을 선사할 수 있는 존재인가? 그렇지 않다. ‘판정 유보’는 냉정하게 말해서 ‘아직 검사가 끝나지 않았다’는 의미일 뿐이다. 초음파를 진행하고 문제가 없으면 나는 환자에게 안심을 선사하겠지만, 초음파상에서 문제가 보였다면 나는 환자의 불안을 재확인시키며 새로운 불안과 공포로 접어들게 하는 존재가 될 뿐이다. 그래서 종종, 나는 환자를 안심시켰다가 최종 결과에서 머쓱해지는 상황을 만들곤 한다. 나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조급한 불안 거두기가 조심스럽기도 한 이유이다. 의학에서 병이 발생할 수 있는 확률은 표현 그대로 통계학적이다. %로 표현되는 유병률은 대부분의 경우 매우 낮다. 따라서 나는 이에 근거하여 환자를 안심시킨다. 하지만, 환자 개인의 입장에서 병의 유무는 0% 아니면 100%인 문제이기에, 내가 시도하려는 안심 주기는 때로 허무하게 실패해버리고 만다. 조급한 불안 거두기가 가지는 근본적 취약점인 것이다. 결국 나는 불안과 공포와의 싸움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많은 경우의 성공과 가끔씩의 실패를 반복하며, 나는 사회가 생산해내고 사람들이 스스로 품어 내 앞으로 가져오는 불안과 공포를 거두어내려 발버둥 칠 것이다. 책임을 우선시하는 세상에서 방어진료라는 목적으로, 결과지에 검게 인쇄된 몇 글자처럼 무미건조해지거나, 객관을 이유로 한 발 물러서 무뚝뚝하게 제삼자 적 거리를 만들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스스로 상처를 만드는 일이 될 수도 있다. 피하고 싶지 않은 어쩔 수 없는 성정이 한몫하는 것일 수도 있고 말이다. 불안과 공포를 바탕으로 성장하는 이 사회의 자본주의적 의료산업에 진절머리가 나기 때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