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69.

by 전영웅

태풍 솔릭이 지나간 자리는 큰 피해는 없었지만, 잘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소소한 피해가 곳곳으로 나 있었다. 크게 한 방 후려친 것이 아니고, 자잘하게 헤집어놓은 형국이었다. 걱정했던 집의 손상은 거의 없었지만, 겉으로는 괜찮아 보이던 텃밭이 많이 다쳐 있었다. 거의 대부분의 작물들이 뿌리가 드러나고 옆으로 기운 채, 지주대에 의지하며 간신히 서 있었다. 나무들은 바람에 사방으로 흔들려 넘어지진 않았어도 밑동 흙이 밀리면서 중심을 잃고 기울어졌다. 깻잎은 바람에 잎들이 타거나 찢어져 거둘 것이 없었다. 나는 나무 지주대를 구해서, 기울어진 나무를 세워 묶어주고 밑동의 흙을 채워주었다. 가지가 너무 많아 바람을 심하게 탈 것 같은 나무는 전정을 해 주었다. 태풍이 지나가고, 땅에 습기가 많아지자 어디선가 모여든 풀모기떼들이 텃밭 한 가운데 홀로 들어선 나에게 몰려들어 물어뜯기 바빴다.

텃밭 피해를 수습하며 동시에 해야 할 것은 가을 텃밭을 준비하는 일이었다. 봄부터 이제껏 자리를 지켜 온 작물들의 일부를 거두어 내고, 그 자리에 가을에 자랄 것들을 파종하거나 모종을 심어야 했다. 가지는 가을 찬바람에 좀 더 열매를 낼 것이니 그대로 두었다. 고추는 수가 많으니 비실해진 것들을 중심으로 반을 뽑아내어 자리를 만들었다. 깻잎은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어 모두 뽑아내었고, 바람에 초토화된 토마토도 살려낼 방법이 없어 모두 거두었다. 서리태와 고구마는 아직 거둘 시기가 아니니 그대로 잘 키워야 한다. 거의가 웃자라거나 풍뎅이에 피해를 당한 바질은 그나마 이파리가 건강해 보이는 것들 몇몇 그루만 남겨두고 모두 뽑아내었다. 그렇게 자리를 정리하니 반 정도의 빈 공간이 만들어졌다. 이제 그 자리에는 무, 배추 등의 가을 텃밭 거리들로 채울 것이다.

때마침 제주시 오일장이 일요일이었다. 나는 아침 일찍 차와 인파로 붐비지 않을 시간에 맞춰 서둘러 오일장으로 향하였다. 모종과 씨앗들은 다양하게 나와 있었다. 배추와 양배추, 비트나 콜라비, 브로콜리, 쪽파 등이 대부분이었다. 시간이 지나며 다행인 것은, 배추 같은 경우엔 모종을 조금씩 나누어 판다는 점이었다. 재작년만 하더라도 배추 모종은 100개가 넘는 모종 한 판을 다 사야만 했다. 그러나 지금은 사는 사람이 원하는 수량만큼만 모종을 잘라서 팔았다. 만족스러운 변화였다. 나는 모종 가게 서너 군데를 휙휙 둘러보며 사갈 모종들을 결정했고, 상태가 가장 맘에 드는 모종들을 골라 주문했다. 배추 모종 30주, 양배추와 방울 양배추 각각 10주씩, 적상추와 대파 조금, 그리고 쪽파 반 되를 샀다. 무는 씨앗으로 샀다.

사실 가을 텃밭은 점점 흥미를 잃어가는 중이다. 이유인즉슨, 2월이 되면 주변에 널린 밭 곳곳에서 상품성이 없어 버려졌지만 먹을 만한 작물들이 흙 위에서 굴러다니기 때문이다. 2월에는 주변을 다니면서 수확이 방금 끝난 밭이 있는지 살핀다. 수확이 끝난 지 하루 이틀 지난 밭들에는 먹기에는 별 문제없지만 상품성이 없어 버려진 작물들이 그대로 밭에 방치되어 있었다. 이것들은 며칠 후면 트랙터에 의해 잘게 갈려져 밭에 그대로 버려질 것이다. 그전에 우리가 거두어서 먹거리로 활용하는 것이다. 그 양도 엄청나서, 밭 두어 군데만 잘 돌아다녀도 양으로 치면 일 년은 거뜬하게 먹고도 남을 만큼 거둘 수 있다. 무, 양배추, 당근, 브로콜리, 대파를 그렇게 거두어 먹었고, 운이 좋으면 콜라비나 감자도 그렇게 거두어 먹을 수 있었다. 장인 장모님은 이 때문에 2월이면 꼭 내려오신다. 주말이면, 나는 어른들이 운을 띄우시지 않아도, 조용히 나갈 채비를 하고 트렁크에 장갑과 칼과 종이상자 등을 챙긴 뒤 드라이브나 하시자고 먼저 제안한다. 그러고는 주변이나 서쪽 아래 동네의 넓은 밭이 많은 곳을 일부러 다니면서 수확이 방금 끝난 밭이 있나 둘러본다. 그런 밭이 보이면, 나는 차를 세웠다. 트렁크를 열어드리면 어른들은 조금 신이 난 모습으로 준비를 하고는 서둘러 밭을 둘러보신다. 잠깐의 발걸음으로 넉넉한 양을 거두어오면 장인 장모님은 즐거워하신다. 거둔 것들은 집으로 가져가 한동안의 우리의 양식이 되거나, 서울로 가져가시거나, 말리기 등의 가공을 거쳐 다른 가족들에게 나누어주시거나 한다. 수확을 끝내고 제초제나 살충제 등의 약을 치는 경우도 있다고는 하지만, 이제 막 수확을 끝낸 밭에서는 그런 상황을 만난 적은 없었다. 내가 이런 파치 줍기에서 가장 민감하게 조심하는 점이다. 남의 밭에 누를 끼치는 것은 아닌가 조심스러운 면도 있다. 그러나 수확이 완벽하게 마무리된 밭만 들어가서 쓸모없다고 버려진 것들 중 먹을만한 것들을 조금 골라 가져오는 일이 이제까지 문제를 일으킨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항상 조심 또 조심하고 있다.

다시 글의 중심으로 돌아와서 이어보자면, 그렇게 주운 파치들이 우리 집 텃밭에서 겨우내 게으르게 키운 것들보다 훨씬 상태가 좋고 커서 더 먹을만하다는 점이다. 작은 땅덩어리에서 겨울을 무사히 넘기며 잘 자랐다고는 하지만, 방제도 비료도 턱없이 부족해서 작고 보잘것없이 크는 것이다. 그에 비해 상품성 없다고 너른 밭에서 버려진 채 방치된 것들은 이게 어째서 상품성이 없는 것일까 싶을 정도로 크고 통통했다. 무와 양배추가 대표적이었다. 무는 생긴 것이 조금 아쉬운 정도이지 크고 통통했고, 양배추는 작지만 속이 꽉 차고 단단해서 우리 식구 몇 끼 먹거나 요리 재료로 사용하는 데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브로콜리 역시 우리 텃밭에서는 자라다 만 것 같지만, 밭에 버려진 것들은 볼품없다 해도 텃밭 것보다 먹을게 많고 실했다. 이러니, 내가 가을 텃밭을 준비하고 모종을 심는 게 맞는 일일까 싶어 지는 것이었다.

그래도, 나는 빈자리를 채웠다. 심은 모종이 이파리를 키우고 파종한 씨앗들이 싹을 내는 과정에서 노심초사하며 마음을 쓰고 몸을 쓰는 것이 텃밭지기의 본질일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배추와 양배추 모종을 빈자리에 간격을 맞추어 심었고, 대파와 상추를 남은 구석자리에 심었다. 텃밭 안쪽으로 남겨졌던 빈자리에 이랑을 새로 만들고 쪽파를 심었다. 무는 이랑에 골을 내고 파종하여 흙으로 덮었다. 비료는 집 뒤편에 반려견의 배설물과 음식물 찌꺼기, 그리고 깎아낸 마당 잔디에 EM을 섞어 만든 퇴비를 활용했다. 퇴비는 텃밭으로 가져와 흙과 뒤섞어 양을 불린 뒤에 심은 모종에 조금씩 얹어주었고, 파종한 자리에는 흙 위로 살살 뿌려주었다. 그렇게 작업을 하고 일주일이 지난 지금, 양배추 모종 일부는 자리를 잡지 못한 채 말라죽었고, 무 싹은 무엇엔가 열심히 갉아먹혔다. 나는 서둘러 저독성 살충제를 물에 타서 모종마다 열심히 뿌려주었다. 시간이 좀 더 지나면, 자리 잡고 이파리를 키우기 시작하는 것들을 조심스레 빈자리에 옮겨심기를 해서 넉넉한 공간을 만들어 줄 것이다.

가을 텃밭은 흥미 유무를 떠나 조금 가볍다. 극한의 무더위가 되려 잡초들의 성장을 억제해서 예년보다는 잡초에 덜 신경 쓴 여름이었지만, 가을 텃밭은 잡초 때문에 몸이 힘들 일이 원래 적기 때문이다. 잘 자라는지 노심초사하다가 찬바람이 깊어지면 배추들은 이파리를 모아 묶어 속이 차도록 유도해주어야 할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서리태와 고구마를 거두고, 빈자리는 양파로 채울 생각이다. 잘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그러고 나면, 손을 좀 쉴 수 있는 겨울이 찾아온다. 작물들이 얼어 죽을 정도의 한파만 오지 않는다면, 몸도 마음도 쉴 수 있는 시간이 겨울이다. 이제 막 여름의 기운이 꺾여 아침저녁으로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지금부터, 겨울이 조금 기다려지는 건 몸과 마음이 조금 쉴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 해의 텃밭농사에서 몸의 움직임과 마음의 소비가 계절의 변화에 따라 한 풀 꺾인 날에 기대는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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