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위독하다고 했다. 속보로 뜬 기사 속 그의 모습이 상상되었다. 중환자실과 수술실을 수없이 오가야만 했던 의사라면 어쩔 수 없이 그 모습이 상상될 수밖에 없다. 앰뷸런스에 실려 대형 종합병원으로 이송되어 중환자실에 눕혀진 그의 모습. 어째서 그가 갑작스럽게 멈췄다 되살린 심장으로, 의식이 없는 상태로 그렇게 누워있단 말인가. 속보가 아니라면, 그는 어디선가 곡을 쓰고 노래를 부르고 있을 것으로 알고 있었을 텐데 말이다. 수많은 연관기사들이 속속 올라왔다. 위밴드, 장천공, 위성형…. 그리고 패혈증, 심정지.. 그의 수술을 집도했다는 의사 역시 기사에서 언급되었다. 이름이 익숙했다. 전공의 시절, 진료협력병원인 우리 병원으로 환자를 데리고 와서 어시스트로 내가 그의 수술을 도왔던 적이 몇 번 있었다. 늦은 시간, 집도의의 자리에 서서 수술을 진행하던 그의 손 역시 어쩔 수 없이 기억이 났다. 남쪽 멀리 섬에서, 내가 아는 사람과 내가 좋아하던 사람 사이에 벌어진 비극을 듣는 일은 슬프고 안타까웠다. 4년 전 단풍이 저물던 가을의 떠들썩했던 그 비극은 이미 우리가 아는 모습대로 마무리되고 정리되었다. 우리는 그토록 매력 있고 사랑스러웠던 마왕을 잃었고, 나는 외과의사의 초라해진 손을 내려다보며 ‘어째서’라는 질문만 마음속으로 반복해야 했다.
어째서 그는 위밴드 수술을 받았을까? 그는 수술적 방법으로 조절이 필요할 만큼 비만이었던 것일까?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자본주의와 외모지상주의를 비판하고, 생긴 대로 자신 있게 살라 매일 새벽시간 라디오에서 나직하게 우리를 위안하던 그였기 때문이다. 그의 사생활을 온전히 알 수 없는 입장에서, 그는 정말 그것이 필요했던가 나는 생각하고 생각했다. 체중관리란 풍요로운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에겐 정말 어려운 일이다. 다이어트란 결국 성공률 제로이고, 관리는 끊임없는 식이조절과 운동밖에 방법이 없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것이 어렵고 체중조절이 반드시 필요하다면, 약품을 먹거나 시술 또는 수술적 도움을 받을 수는 있다. 엄밀히 말해서, 체중조절이 반드시 필요한 조건은 당뇨나 고혈압 같은, 신체의 심각할 수 있는 질환이 비만과 동반되었을 경우이다. 비만수술을 필요로 하는 경우는 BMI를 기준으로 판단한다. BMI가 35-40의 고도비만이면 특정 질환이 없어도 비만수술의 대상이 된다. 심각한 기저질환을 동반한 BMI 30-35의 비만 역시 수술의 적응증이 된다. 최근엔 기저질환을 동반한 BMI 30 이상의 비만에서 수술을 적용할 수 있다고 정리한다. 기저질환이 없는 170cm의 신장을 가진 이가 100kg 이상의 몸무게라면 비만수술을 적용해 볼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여기엔 전제조건이 붙는다. 이전에 식이조절이나 운동, 약물치료 등의 물리적 노력으로 체중조절을 적극적으로 시도했으나 조절되지 않았다는 조건이다. 그리고, 최근의 의학적 기준이라는 것이 자본주의의 흐름에 편승하는 경향이 있기도 해서, 학회 등지에서 제시되는 이러한 기준은 점점 느슨해지고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는 어떤 기준으로 위밴드 수술을 결정했던 것일까? 그가 수술을 결정하기 전에 체중조절을 위해 노력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도 자본주의 사회의 편리에 어쩔 수 없이 중독되어가던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을까 하는 작은 아쉬움이 남았다.
종합병원을 그만두고 나올 때, 인사를 하러 들른 보험과 에서 직원은 아쉬움을 담아 나에게 말했었다. ‘과장님만큼 환자 생각하면서 오더 내린 분도 없었어요.’ 나는 그 말에 약간의 우쭐과 심각하게 부족한 나의 현실감각을 화들짝 놀라듯 깨달았다. 이사장이 말했던 내가 그만두어야 하는 이유 중 하나는 매출 부족이었다. 외과라는 과목이 대부분 보험이 적용되는 진료행위 안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음을 감안해도, 보험 과목만으로는 병원의 운영이 힘들다는 게 이사장의 하소연이었다.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말이다. 어쭙잖은 사명과 원칙만으로 의사를 하기엔 현실은 냉혹했고, 그럼에도 고집을 부리기엔 내 목구멍이 포도청이었다. 적절한 타협과 적당한 욕심이 사명과 원칙 안으로 잘 버무려져야 환자도 만족하고 나 스스로도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 현실이었다. 종합병원에서 세상 순수한 마음으로 일하다 나와 작은 의원의 부원장으로 일하는 현재의 나는 그렇게 세상을 알아가고 있다. 그런 만큼 난 진료영역도 넓혀 주로 급여행위 안에서 행하던 진료를 비급여 영역까지 넓혀가고 있고, 그런 영역 중 하나가 보톡스와 비만 영역이다.
보톡스 시술을 시작하고 나는 전혀 다른 진료영역을 느끼게 되었다. 미용 진료는 비급여 영역인지라 자율경쟁에 따라 시술비가 결정되지만, 국가의 통제를 받지 않으니 마음이 한결 가벼웠고 시술 자체의 부담도 적었다. 위나 대장내시경을 하면서 조직검사를 하고 용종을 떼면서는, 급여기준에 따라 삭감될 위험이 있는 행위에 부담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대장의 용종을 떼면서, 출혈이나 천공이 발생하면 어쩌나 하는 상당한 위압의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환자의 상태가 심각해질 수 있는 상황에 대한 어떠한 안전장치도 보장받지 못한 채, 심적 부담을 얹은 원칙적 시술법에 오차가 발생하지 않기만을 바래야 했다. 그러나, 보톡스는 잠시 턱이 무겁거나 눈이 잠시 무거워지는 정도의 가벼운 부작용만 시간을 담아 기다리면 해결되었다. 비대칭이 발생하면 포인트를 잡아 추가 시술만 해 주면 되었다. 이래서 다들 비급여 진료에 몰리는 건가 보구나 하는 깨달음이 왔다. 그를 집도한 의사도 그랬을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외과 전문의를 취득하고 나면, 종합병원에서 정해진 급여를 받고 버티며 사명감을 유지하던지, 강호라 표현되는 병원 바깥의 세상으로 나와 무언가를 개척하던지 해야 하는 상황이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수술적 비만치료를 선택했다. 그는 나름 유명했다. 그에게 수술받고 나서 섬의 종합병원에서 근무하는 나에게 봉합사를 제거받은 환자도 몇 있었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는 현재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몰락했다. 그에게는 과정과 결과에 대한 명백한 책임이 있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수술에 어떠한 기준을 세워 두었는지 알 수 없다. 어째서, 비만 수술에 그다지 필요 없어 보이는 수술을 추가로 시행했는지 알 수 없다. 기본 흉부 방사선 사진에서도 보였다는 심막 내 공기 음영을 놓쳤는지 솔직히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나는 그를 비난하지 못한다. 그에게는 나름 고심해서 선택한 자신의 앞길이었을 것이다. 노력에 비해 현실적 보상이 아쉬웠고, 사명만을 지키기엔 심평원에서 제시하는 기준들이 스스로를 비루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교과서와는 다른 심평원의 기준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면, 진료실에 앉은 의사 스스로가 비난을 감당해야 하는 현실은 사명감에 생채기가 나기에도 딱 좋았다. 부풀리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가기 힘든 자본의 현실 속에서 자신을 최대한 내세우며 병원을 운영해야 했을 것이다. 비난을 담은 아쉬움이 남는 것은 이 지점이다. 그렇게 자신의 길을 선택했으면 최대한 조심하고 차분하게 진료하고 환자를 대했어야 했다는 것. 수술의 기준도 원칙도 모호했고, 수술 후 환자관리에도 허점이 많이 있었다는 것.. 그는 결국, 한국의료 현실 속에서 외과의사가 취할 수 있는 나름의 선택이란 어떤 것인지를 증명했고, 나름의 선택 이후에 원칙을 잃어버린 반면교사의 지극한 예가 되어버렸다.
‘내 마음 깊은 곳의 너’와 ‘날아라 병아리’를 들으며 공부했고, ‘아버지와 나’를 들으며 어른이라는 역할에 대한 어렴풋한 감정을 느꼈었다. ‘해에게서 소년에게’와 ‘Komerican Blues’를 듣고, 새벽 낚시 출조의 라디오에서 그 목소리를 가끔씩 들었다. 그러다, 유언은 급작스레 실현되어 ‘민물장어의 꿈’이 울려 퍼졌고, 갑작스러운 아쉬움에 나는 그의 유작이 된 Reboot Yourself 앨범을 CD장 위에 고이 올려두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속한 의원에서 할 수 있는 진료영역의 확장을 위해, 보톡스에 이어 비만의 약물치료와 내시경적 시술을 공부해야 한다. 나는 이율배반의 떨떠름한 감정을 안고 현실을 디뎌야 한다. 그를 잃어야만 했던 선택을 내가 집어 들고, 가끔씩 그의 노래를 들으며 현실에 거리를 둔 위안에 잠깐씩 발을 담글 것이다. 그의 죽음은 어느 하나의 이유만은 아니다. 언제나 당당하던 그는 어째서 그런 시술을 선택했는지 알 수 없다. 그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의사는 책임 이면의 어찌할 수 없는 현실과 상황이라는 난감함을 가진다. 의사로서 그와 나의 선택은 자본을 바탕으로 한 자율경쟁과 국가통제가 어색하게 뒤섞여 있는 한국의료에서 취할 수 있는 나름의 합리적 선택이다. 그것은 자본시장에서의 수요로 증명된다. 그리고, 이 모든 상황 위에 절대적 비난은 존재하지 못한다. 책임져야 할 것은 책임지되, 한없이 무거운 아쉬움이 우리를 뒤덮었고 현실은 무심하고 아득하기만 하다. 새벽 운전길 그의 목소리가 그립고 나는 아득함 속의 무언가를 쥐어 잡고 움직여야만 한다. 가슴속 껄끄러움과 메스꺼움을 가라앉힐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