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가 벌어지고 나서, 사람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었다. 한 부류는 기억에의 투쟁으로 끊임없이 세월호를 의식하려 했다. 다른 한 부류는 이미 벌어진 참사를 잊고 다시 나가자고 했다. 후자의 경우는 매우 폭력적이었고, 왜곡으로 본질을 흐리려 했다는 점에서 도덕적이지 못하며 악마적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사람들 머릿속 세월호의 농도는 점점 옅여지고 있었다. 그것이, 정신없이 변화하는 세상의 흐름 속 어쩔 수 없는 현상인지, 아니면 트라우마를 대하는 인간 집단의 본능적 현상인지는 알 수 없다.
2차 대전 당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생존한 이탈리아 화학자 프리모 레비는, 인류 역사에서 도대체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던 자신의 경험을 증거하고 기억하려 노력했다. 기억과 증거는 단순하지 않았다. 자신 안에서조차 그 엄청난 범죄에 가담했을 수도 있는 조건들마저도 날카롭고 분명하게 도려내는 고통의 반추였다. 그에게 자신은, 범죄적 학대에서 운 좋게 살아난, 고통에서 벗어난 선인의 입장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 책을 마지막으로 자택에서 자살하고 만다. 그 이유를 설명하는 많은 이야기들 중 하나는, 자신이 경험한 인류의 범죄를 제대로 증거 하지 못했음에 대한 자책이자, 알면 알 수록 인간에 대한 절망만이 느껴졌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나치의 강제수용소는 어떻게 만들어지고 유지될 수 있었는가.. 이는 인간의 상식에 견주어 보아도 대단한 의문이지 않을 수 없다. 나치의 강압만으로는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반 대중들의 암묵이나 동의가 있었기에 가능하다는 점에서, 당시 나치를 지지했던 유럽인들은 어떤 의미에서든 동조자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한 배경은 다시 나치의 힘이 된다. 나치는 수용소의 유대인들에게 선언한다. ‘이 전쟁이 어떻게 종결되든 우리는 이 싸움에서 이겼다. 너희들은 이 시설들과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설령 너희들이 살아남아 증언한다 한들, 세상은 이 엄청난 일을 믿어주지 않을 것이다.’
프리모 레비는 단순한 이분법으로 가해자와 희생자를 구분하지 않는다. 나치는 분명 가해자로서의 범죄 책임이 있지만, 희생자라고 해서 모두가 선인의 자리에 있지 않는다 했다. 하루를 추위와 배고픔과 구타를 피할 궁리 속에서 살아야 했고, 강제노동 속에서 눈 앞의 죽음을 항상 의식해야 했던 지옥 속에서도, 계급은 여지없이 발생하였다고 증언한다. 계급의 차이가 주는 특권이란 타인보다 며칠 더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생존자들은 대체로 지옥 안에서도 그렇게 특권을 부여잡을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같은 유대인들을 통제하고, 유대인들을 향한 온갖 박해와 실험에 보조로 참여했으며, 가스실에서 쏟아져 나온 시체더미들을 깔끔하게 처리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그들은 핍박자라는 가장 밑바닥에서도 회색지대를 이룬 최악의 사람들, 이기주의자들, 폭력자들이나 무감각한 자들이라고 프리모 레비는 증언한다.
그는 생존 이후 증거하고 기록하는 과정에서, 용서에 대해 이야기한다. 용서는 가해자가 범죄에 대한 철저한 대가를 치르고, 철저하게 뉘우치며, 팩트로서 자신이 이전의 사람이 아님을 분명하게 증명한 후에 이루어질 수 있음을 강조한다. 피해자 입장에서 용서는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는, 절대적 권함임도 강조한다. 세상의 모든 관념적인 용서는 있었던 사실을 왜곡하거나 본질을 흐리게 할 뿐이다. 세월호를 잊고 다시 시작하자는 이들의 파렴치함은 여기서 엿볼 수 있다. 세월호의 원인, 가해자들, 그리고 잊고자 하는 이유들.. 그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이권을 얻고자 하는 이들의 교묘한 술수일 뿐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용서는 모든 것이 밝혀진 후에 이루어져야 한다. 단, 너무 늦지 않은 시간에 온전한 팩트가 밝혀져야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우리는 세월호를 기억하고 있는가. 사실 이런 단순한 질문 하나로 세월호를 의식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혹시, 세월호 참사를 일으킨 원인들 중 하나이지 않을까 하는 고민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참사를 은폐하거나 세월호의 진실을 밝히는 데 이렇게 많은 시간이 들게끔 지연시킨 장본인이 아닐까 하는 고민 역시 필요하다. 참사의 생존자들과 유가족들의 고통 앞에서 용서를 강요하지는 않았나 하는 돌아봄도 필요하다. 우리는 세월호를 통해 분명한 트라우마를 안았고, 그것은 여전히 우리의 가슴 한편에 묵직하게 남아있다. 그 고통을 일부러 숨기고 침묵함으로, 은폐와 지연의 범죄에 의도와 상관없는 기여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는 프리모 레비의 작업을 통해 돌아보아야 한다. 프리모 레비의 자살 전 마지막 저작인 이 책의 제목은 단테의 신곡 지옥편 가운데 제8원의 네 번째 구덩이를 묘사하는 첫 시구에서 인용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책이 한국어로 발간될 당시는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직후였다. 제목과 참사가 어쩔 수 없이 연관된 만큼, 시간이 지날수록 이 책이 말하는 트라우마와 용서는 세월호를 곱씹게 한다. 인류 역사의 거대한 범죄 앞에서 인간은 반성을 하는가 싶지만, 세상은 세계대전 이후로도 크고 작은 반인륜적 범죄를 경험해야 했다. 그리고 우리는 국가 안에서 벌어진 참사 앞에서 다시, 결코 가볍지 않은 깊은 절망을 느껴야만 했다. 인간은 반성을 통해 발전이 가능한가라는 의문을 다시 갖는다. 프리모 레비를 포함에서, 끝이었을 듯한 인간의 지옥에서 가까스로 살아 나온 생존자들이 다시 자살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생각한다. 살아 나온 지옥 밖의 세상에서 찾을 수 없었던 자신의 정체성과, 돌아볼수록 커지기만 하는 인간에의 절망감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