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실에 들어와 내 옆에 앉은 환자에게 어떻게 오셨냐는 질문으로 진료를 시작했다. 나는 정면의 모니터를 바라보며, 환자가 옆에서 말하는 증상들을 키보드를 두드려 전자차트에 입력했다. 환자는 계속 내 옆에서 자신의 증상을 설명하고, 나는 이따금씩 환자에게 고개를 돌려가며 모니터에 시선을 둔다. 잠시 입력을 멈추고, 환자 쪽으로 몸을 돌려서는 청진기나 설압자 등으로 환자를 진찰한다. 배가 아프면 옆의 침대에 눕히고는 배를 만져본다. 다시 나는 모니터가 있는 책상 앞에 앉고, 환자는 둥글고 낮은 의자에 앉아 처음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내가 진찰한 환자의 상태를 키보드를 두드려 모니터 안의 전자차트에 입력한다.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한 채, 환자의 상태를 간단히 설명한다. 처방할 약을 입력하면서 역시 시선은 모니터에 고정한 채, 환자가 묻는 몇 가지 질문에 대답한다. 입력이 거의 완료될 즈음까지 환자와의 대화가 이어진다면, 그제야 나는 의자를 환자 쪽으로 돌려 환자와 정면으로 마주하고 하던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그러나, 대부분은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하고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리는 와중에 진료는 마치게 된다. 몇 번 정도 고개를 돌려 환자와 시선을 맞추다가 ‘다 되었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마지막으로 고개를 돌려 환자와 시선을 마주한다. 나는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려 입력을 완료하는 중이고, 환자는 일어서서 진료실 밖으로 나선다.
가끔은 약간의 고민을 담아 증상과 처방을 입력하는데, 환자가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있어나기도 한다. 그러면 나는 환자를 바라보며 ‘어디 가셔요? 아직 설명할 것이 남았는데요.’라고 묻는다. 환자는 대답한다. ‘아니, 저는 진료가 다 끝난 줄 알았어요.’ 라며 다시 자리에 앉는다. 바로 남은 설명을 이어가고, 남은 처방을 입력하고 진료를 마무리하지만, 이런 경우엔 작은 생각이 남는다. 내 옆으로 놓인 저 둥근 의자에 앉아 환자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상상을 한다. 가끔씩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면서 타닥타닥 열심히 무언가를 모니터에 입력하는 내 앞의 사람을 말이다. 왠지 사무적으로 보이고, 지쳐 보이지는 않았을까. 어느 정도의 거리감을 느끼지는 않았을까. 나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맞는지 의심하지 않았을까..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다른 어딘가에 시선을 둔 내 앞의 사람은 대화 상대가 아닌 제삼자 같은 존재로 느껴지지 않았을까..
종이차트에 펜으로 항목을 채워나가던 시절엔 의사의 몸은 환자 쪽으로 좀 더 향할 수 있었다. 물론, 펜으로 적느라 종이차트를 고개 숙여 바라보아야만 하고, 펜으로 적은 글씨들을 알아볼 수가 없는 일도 많았다. 그래도, 종이차트 시절엔 환자에 좀 더 가까울 수 있었고, 그것이 환자에게 좀 더 집중한다는 느낌을 줄 수 있었다. 전자차트를 사용한 이후로 진료는 확실히 편해졌다. 차트나 필름을 일일이 챙겨야 하는 번거로움도 사라졌다. 글씨는 객관적으로 모두 알아볼 수 있고, 처방약의 코드를 일일이 외우지 않아도 되었다. 내 앞에 놓인 모니터 두 대 안에서 진료에 필요한 거의 모든 것들을 보고 입력하며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편리해졌다는데, 이상하게도 진료의 가장 중요한 대상인 환자 하고는 어쩐지 거리가 생긴 듯한 기분을 지울 수 없다. 내가 가끔씩 느끼는 미안함이나 작은 거리감 등의 이유는 이와 무관하지 않다.
고민을 하게 된다. 그 미안함과 거리감은 어떻게 없애고 좁힐 것인가. 그러나, 나는 매번 시선을 환자보다는 모니터에 더 주게 된다. 환자를 만져가며 통증의 원인을 천천히 찾아가거나, 찢어진 상처를 봉합하거나 하는 직접 접촉이 있으면 좀 덜하다. 진료기록을 남기고 처방하는 일은 어쩔 수 없이 모니터를 더 바라보게 된다. 시선을 마주하지 못한다는 것의 불편함은 둘 중 하나를 소외시킨다. 대부분은 환자가 소외된다. 그래서, 진료가 끝난 줄 알고 중간의 잠시 정적에 일어선다. 그러나,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한 내가 소외당하기도 한다. 정기적인 약 처방을 원하거나, 진료보다는 간단한 감기약이나 받으러 왔다는 의도를 아무렇지 않게 내보이는 환자들 앞에서 나는 종종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한 자판기 신세가 되어버린다. 그런 이들에게 나는 볼 것 없이 약만 입력 처방만 해 주면 되는 사람으로 전락해 버린다. 시선을 마주하지 않는 자세와 위치에서 그것은 더욱 부담 없고 간편한 요구가 된다. 생각은 언제나 환자와 시선을 좀 더 마주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나는 어쩔 수 없이 내 책상 앞의 모니터를 더 바라보게 된다.
편리라는 것, 그것은 인간의 노동과 그에 따른 고통과 번거로움을 줄이고자 고민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편리해져서 소외당하는 건 언제나 인간이었다. 소외의 대상은 나이기도 하고 나와 마주한 사람이기도 하고, 나와 네가 알지 못하는 제삼자이기도 했다. 스마트폰이 생기며 상대의 전화번호는 굳이 적거나 외우지 않아도 되었다. 내비게이션이 있으니, 기억을 더듬거나 설명을 짚어가며 목적지를 찾아갈 필요도 사라졌다. 내 몸이 할 수 있는 간단한 능력들이 점점 소외당하고 있다. 다양한 기능의 스마트폰은 삶을 편리하게 해 주었지만, 누군가에게는 시도 때도 없이 일방적인 강요를 주고받는 수단이 되었다. 상대방의 일상과 존재가 소외당한다. 대형마트의 편리함은 한자리에서 자본주의의 풍성함을 경험하게 해 주지만, 유통의 획일화와 상품의 독점화를 통해 다양성과 구조를 단순화시켰다. 그리고 그것의 결과는, 내가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노동과 기회를 박탈했고 그를 소외시켰다. 그 구조는 더욱 심화되어서, 자신이 소외당하고 있음에도 깨닫지 못하거나, 소외당하고 있음에도 단순과 독점의 구조를 이용할 수밖에 없는 굴욕을 만들어냈다. 편리에의 중독.. 사람들은 그렇게 변하는 세상에 적응해가고, 나와 같은 쓸데없이 예민한 사람들이나 의미 없는 고민을 이어나간다.
진료실에서 나는 분명 편해졌다. 과거, 환자의 이름이 적힌 차트 더미들을 옆에 쌓아두고, 볼펜으로 적힌 오더마다 일일이 슬립지를 써서 차트에 끼워야 했던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편리해졌다. 커다란 필름 창고에서 다음날 아침 미팅에 쓸 방사선 필름을 일일이 찾아야 했던 시절과는 달리, 영상 전송으로 모니터에서 바로 특정환자의 특정 사진을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컴퓨터와 연결된 서버만 있으면, 굳이 차트나 필름을 보관할 공간이 없어도 된다. 내가 자료를 재촉하지 않아도 되고, 직원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니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환자에게의 작은 미안함과 미묘한 거리감은 조금 커졌다. 때로는 소외의 대상이 나 자신인 거 같아, 당당하게 한 두 마디만 나에게 던지고 진료실을 나가는 환자들 앞에서 존재의 상실을 느낀다. 이게 맞는 것일까? 분명한 것은 편해진 구조 안에서 사람들은 그 편리를 당연시하고 간편하게 누린다. 그런데, 나는 어째서 불편한 마음을 떨치지 못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